<폭력의 씨앗> The Seeds of Violence
임태규 / 한국 / 2017년 / 82분 / 경쟁부문: 한국경쟁
군대와 가정 안에서 폭력에 노출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의 하루를 좇는 영화. 군대 선임병들과 단체로 외박을 나가기로 한 날, 이주용(이가섭) 일병은 고참들의 비위를 맞추랴, 눈치 없는 후임 병사 필립(정재윤)을 챙기랴 정신이 없다. 게다가 누군가 박 병장(오규철)의 행실을 고발하는 쪽지를 간부들에게 건넸다는 사실이 사병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즐거워야 할 외박이 가혹행위의 장으로 변해버리자, 주용은 매형 수남(박성일)의 병원으로 필립을 데려가 치료를 해주기로 한다. 그런데 일은 점점 꼬여만간다. 영화는 주용과 필립을 따라가면서 이들이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했던 폭력의 세계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살풍경에 주목한다. 모든 걸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남성들의 행태가 사람을 어떻게,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실험하듯 몰아붙이는 카메라의 건조한 시선이 인상적이다.
<우리를 침범하는 것들> Trespass Against Us
애덤 스미스 / 영국 / 2016년 / 99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운 히피 범죄자 무리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 드라마. 채드(마이클 파스빈더)는 범죄자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아버지인 콜비(브렌던 글리슨)의 영향 아래에서 강탈범죄에 탁월한 능력을 쌓은 인물이다. 경찰 당국도 이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지만 매번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철저하게 증거를 은폐하는 바람에 허탕을 치기 일쑤다. 그런데 채드는 횡포한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직계 가족들과 평범한 삶을 살 궁리를 하는 중이다. 그 와중에 콜비 무리는 예전과 같지 않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경찰의 법망은 도심 외각의 캠핑촌에서 머무는 범죄자 가족의 숨통을 서서히 죄여온다. “권리를 침해받지 않으려면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도둑질을 일삼는 콜비의 궤변과 난삽한 일상 속에서 영화는 강탈과 탈주의 쾌감과는 조금 다른 점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무려 3대째 가업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범죄 이력이 아이들로 하여금 서서히 죄와 자유를 구분하는 도덕의식을 갖게 만드는 것.
<정글의 법칙> Struggle for Life
앙토냉 페레자코 / 프랑스 / 2016년 / 99분 / 프론트라인
아마도 올해 초청작 가운데 가장 어이없이 웃기는, 심지어 기괴하고 난해한 개그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슬랩스틱 코미디영화일 듯. 정부 기관의 인턴십에 참여하게 된 마크(빈센트 매케인)는 상관으로부터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프랑스령 기아나라는 도시에 건설될 스키장의 규격 관리를 감독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졸지에 출근 첫날부터 밀림으로 출장을 떠나게 된 그는 현장에 도착해 리조트 창설 총감독인 갈가릭(마티외 아말릭)으로부터 다소 황당한 현장 진행 상황을 전해 듣게 되고, 산림청 직원 타잔(비말라 폰스)과 함께 직접 스키장 건설 현장을 찾아나선다. 밀림 한복판에 건설될 스키장의 규격 감독을 위해 정부 기관의 인턴십이 파견된다는 말도 안 되는 여정 곳곳에는 기상천외한 초현실적 사건이 숨겨져 있다. 마크와 타잔은 밀림 한복판에서 온갖 맹수의 위협과 무자비한 게릴라와 식인종의 공포, 그리고 엄청난 최음제 파티 속에서 살아남으며 부조리한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의 허와 실을 경험하게 된다.
<버블 패밀리> Family in the Bubble
마민지 / 한국 / 2017년 / 77분 / 경쟁부문: 한국경쟁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강남 개발의 수혜를 입고 탄생한 한국형 중산층 가족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과 삶을 위해 독립을 선언한 ‘나’(마민지)가 ‘왜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학자금 대출이나 월세를 걱정하며 살아야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감독인 나의 시선에서 가족의 역사를 되짚어보며 왜 지금과 같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하게 됐는지를 따져보기 시작하는 것. 잠실 근교에 위치한 허름한 빌라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 소위 잠실 아파트 부자 시절에 엄마가 기록했던 홈비디오 영상 속에 담긴 과거의 영상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면서 감독이 견지하는 문제의식을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 시대”라는 이른바 3저 호황을 통해 부동산으로 성공을 맛봤고 그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부모 세대의 모습을 통해 감독 자신의 치부일 수도 있는 서울 중산층의 심약한 뿌리, 즉 당시 사회 깊이 자리잡혀 있었던 부동산 탐욕의 뿌리를 드러내 보인다.
<홈> Home
핀 트로흐 / 벨기에 / 2016년 / 103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스펙트럼
10대들의 혼돈과 불안의 근원인 ‘집’의 의미에 대해 파고든다. 소년원에서 출소한 케빈(세바스찬 반 던)은 화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일삼는 성격 탓에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어 사촌 윌리엄(로비 클레이렌) 집에 머물게 된다. 그가 보기에 친척들의 일상은 무척 화목해 보인다. 학교가 아닌 노동현장에서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케빈은 윌리엄을 비롯한 친구들과 조금씩 마음을 터놓고 지내면서 안정적으로 변해가는 듯하다. 하지만 엄마와의 관계 때문에 말도 못할 고통을 겪는 존(미스트랄 귀도티)과 친해지면서 어른들을 향한 케빈의 불신은 조금씩 커져만 가고 급기야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인스타그램 세대에 친숙한 카메라앵글 사이즈, 스마트폰 카메라 영상과 감각적인 음악 삽입 등의 경쾌한 형식을 통해 10대들의 가장 잔인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전주시네마프로젝트 <N프로젝트> <시인의 사랑> <초행>
전주국제영화제가 2014년부터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는 장편제작과정인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영화제의 간판프로그램이다. 지난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소개됐던 조재민 감독의 <눈발>, 김수현 감독의 <우리 손자 베스트>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던 만큼 올해 공개될 한국영화의 면면 역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특히 올해는 운영상의 변화가 있다. 매년 2편의 한국영화와 1편의 외화를 제작했던 전주시네마프로젝트가 한국 독립영화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의미로 3편 모두 한국영화로 꾸린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젝트마켓(JPM)에서 극영화 피칭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김양희 감독의 <시인의 사랑>과 데뷔작 <철원기행>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신예 김대환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초행>, 그리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를 다룬 이창재 감독의 다큐멘터리 <N프로젝트>가 올해 프로젝트 선정작이다. 감독 겸 배우 양익준과 전혜진, 정가람이 출연하는 김양희 감독의 <시인의 사랑>은 제주도 토박이 시인이 우연히 젊은 청년과 마음을 나누게 되는 드라마. 김대환 감독은 동거 6년차 커플에게 느닷없이 불어닥친 임신이란 현실을 통해 전작 <철원기행>에 이어 또다시 가족관계를 내밀하게 들여다볼 예정이다. 최근의 대선 이슈와 맞물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N프로젝트>는 2002년, 새천년민주당이 국민참여 경선제를 도입할 당시, 지지율 2%에 불과했던 ’꼴찌’ 후보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에서 당시 이창재 감독이 “전무후무한 시민혁명”이라 여겼던 시민의 결속 동기는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