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이화정 기자의 2017 칸국제영화제 중간결산 리포트
2017-05-31
글 : 이화정
테러에 대한 공포는 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5월 20일 <리다우터블>이 상영되는 칸 드뷔시 극장에서 폭발물로 의심되는 물건이 극장 안에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어, 경찰 병력이 급파되었다. 칸의 도로를 채운 경찰차들.

“대피!!!”(evacuation!!!) 5월 20일 경쟁작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리다우터블>이 상영되는 칸 드뷔시 극장 앞, 상영관에서 뛰쳐나온 스탭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크루아제트 거리를 울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 시간 이상 상영을 기다리던 이들은 대피명령에도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급파된 경찰 병력에 이유를 물으니 “폭탄물로 의심되는 물건이 든 가방이 극장 안에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영화 상영은 이 난장이 정리된 지 40분도 더 지나 시작됐다. 장 뤽 고다르의 이야기를 그린 하자나비시우스의 영화가 ‘68년 5월의 우스꽝스러운 순간만을 담은’, ‘쓸모없는 고다르 전기’라는 악평과 함께 영화제 공식 <스크린 데일리> 평점 최하위를 기록하기까지는 테러 소동으로 피곤해진 기자들의 영향도 0.000000001%는 있었던 걸까(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테러의 먹구름으로부터 부디 무사하기를’ 바란 영화제쪽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테러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강력한 올해의 ‘영화’였다. 강화된 보안검색에 항의하던 기자는 그 자리에서 배지를 뺏기고 퇴장당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수석 프로그래머 장 프랑수아로제의 시가 커터가 눈앞에서 가차없이 파기됐다. 마침 영국 테러 소식이 전해졌고 영화제 역시 공식적으로 조의를 표했다. 종군기자도 아닐진대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간 그곳에, 70주년 칸국제영화제의 경쟁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

하네케에겐 없고 즈비아긴체프에겐 있는 것

23일 현재 반환점을 돌아 이제는 총 19작품 중 총 5편의 경쟁작만을 남겨둔 시점. 영국 테러 사망자에 대한 조의로 칸국제영화제 70주년 기념 폭죽도 없었고, ‘영화 폭죽’도 아직까지 없다. 줄이 가장 길었던 작품이자 세 번째 황금종려상 후보에 점쳐졌던 미하엘 하네케의 <해피 엔드>가 평작에 그친 것도 아쉬움 중 하나였다. 상영 후 “하네케는 절대 세 번째 황금종려상이 아니다”라는 찬물세례 트윗 반응이 올라왔다. 가족 삼대의 이야기로, <아무르>(2012)에서와 같이 장 루이 트랭티냥, 이자벨 위페르가 부녀로 출연하며, 하네케 영화의 요약판이자 ‘<아무르>의 속편’ 같은 인상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네케의 작품일까’ 싶을 만큼 한층 가벼워진 터치다. 함께 있지만 서로 무관심한 가족 관계가 그들이 각자 소통하는 스마트폰 영상으로 재기 있게 표현된다. 전작이 담았던 서늘한 서스펜스의 기운, 삶과 죽음을 향한 <아무르>의 극단적 선택은, 이번엔 오히려 가족에 의해 만류되고 유보된다.

대신 하네케의 작품이 올해 ‘빼놓은’ 그 냉기 가득한 현실의 모습은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에 모두 전이된 것 같은 기분이다. 첫 공개된 경쟁작이자 지금까지 영화제 공식 데일리 <스크린 데일리> 평점 3.2점을 얻은(4점 만점) 가장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작 중 한편이다. 이혼을 앞둔 부부 앞에 놓인 어린 소년의 황폐한 심리, 실종된 소년이 가져온 파국이 러시아 도심의 삭막한 겨울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6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가져간 <리바이어던>(2014)을 비롯해 줄곧 즈비아긴체프 감독과 함께 작업해온 촬영감독 미하일 크리크만의 촬영이 이번에도 영화의 공기를 만들어낸다. 눈덮인 광활한 숲에서 소년을 찾아 헤매는 수색대의 울림이, <리바이어던>에 이어 또 한번 정체된 러시아 사회를 흔든다.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점쳐지는 또 한편의 작품은 로랑 캉테 감독의 시나리오 협력자인 로빈 캉필로가 연출한 <120 비츠 퍼 미니트>이다. 성매매 소년들의 에이즈 운동단체 액트업(ACT UP)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1990년대 초반, 질병의 공포와 차별에 맞서 싸웠던 에이즈 운동의 활동을 통해 당시 사회를 조망한다. 시나리오작가인 필립 망거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 매체 <텔레라마>에서는 “<텔레라마> 기자들이 이렇게 다수로 만점을 기록한 적이 없다”라며 자신들의 평점에 놀라움을 드러냈고, 미국 <버라이어티> 역시 “섹시하고 통찰력 있고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라 평했다(지난해 호평일색이었던 평가와 달리 빈손으로 돌아간 <토니 에드만>은 어쩌고). <다른 나라에서>(2012) 이후 5년 만에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그 후>는 평가는 갈리지만, <클레어의 카메라>(특별상영)로 두편이나 초청되는 드문 예로 수상 가능성을 점쳐보게 만든다(자세한 내용은 48쪽 참조).

미하엘 하네케의 <해피 엔드>는 평작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거장도, 중국영화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도 없이

프로그램은 평이했지만, 후반에 이르는 지금까지 인상적인 작품들은 적지 않았다. 영화제 마지막으로 추가 초청된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트룬드의 <더 스퀘어>도 화제의 반열에 올랐다. 전작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이 눈사태에 대처하는 남편의 지질한 자세로 웃음을 이끌어냈다면, 이번 작품은 잘나가는 미술관 관장 큐레이터 크리스천을 통해 예술계의 허세를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침팬지와 사는 여성, 젠체하는 인물들을 위협하는 행위 예술가 등을 통해 곳곳에 루벤 외스트룬드의 코믹 코드와 서스펜스가 잔뜩 살아 있지만 평가는 다소 저조한 편. 특히 스키 리조트라는 한정된 공간, 간결한 형식, 짧은 러닝타임으로 주제에 접근했던 전작의 명성에 못 미친다는 평이다. “2시간22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 덜 효과적인 구성”(영국 <가디언>)이라는 평가가 매체마다 쏟아졌지만 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 또 ‘잘생기고 잘나가는’ 캐릭터를 고스란히 구현한 배우 클라에스 방이 하나둘 망가져 나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은 전작 <캐롤>(2015)의 파격적인 정서를 떠나, 어린아이의 성장담이라는 점에서 보다 대중적 시도를 한 작품이다. 전작 <화이트 갓>으로 2014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한 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의 <주피터스 문>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난민 캠프라는 리얼한 현실과 공중부양이라는 판타지한 소재를 접목한 재기 있는 작품으로,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두편의 영화는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통해 전한다. 자세한 내용은 50쪽 참조). 이 밖에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킬링 오브 세이크리드 디어>, 가와세 나오미의 <히카리>, 자크 돌란의 <로뎅> 등이 공개됐다.

미하엘 하네케를 제외한 거장감독의 부재, (칸의 초청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작품의 부재, 중국 자국의 검열 강화(중국광전총국에서 주는 사전검열제도로 용표(용마크)를 받지 못한 작품은 자국 내 개봉이 불허된다. 그간 국제영화제 출품작들은 예외였으나 지난 4월 이후 바뀌었다. 출품작 모집시기에 중국 검열의 직격탄을 맞은 칸국제영화제는 결국 중국영화를 모두 배제한 프로그래밍을 택했다. 이는 한국 작품의 급부상에 대한 이유로 작용하기도 한다)로 인한 중국 작품의 부재 등 올해 칸국제영화제는 ‘부재’를 채울 어떤 대안이 필요했다. <스크린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음반을 좋아하지만 콘서트에 가서 듣는 걸 더 좋아한다”라며 칸국제영화제를 콘서트에 비유한 예술감독 티에리 프레모도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변화’를 받아들인 한해였다. 그리고 넷플릭스 작품은 중반을 넘어선 지금까지 이렇다 할 화제작을 생산하지 못한 올해의 영화제에 이슈몰이를 해준 영화제의 ‘선택’이었다. 물론 영화제 초반 봉준호 감독의 <옥자> 소동 이후 후반부에 공개된 같은 노아 바움백 감독의 넷플릭스 작품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는 가족 드라마로 “<옥자>보다 작은 화면에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매혹당한 사람들>

이변의 영화를 기다리며

칸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한 러시아 기자는 경쟁부문에 초청된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를 언급하며 “이번에 러시아 작품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면 60년 만의 일”이라며, “러시아 예술영화가 힘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러시아 장르영화가 마켓에서 호응을 얻고, 독립영화 붐이 감지되는 등 최근 새롭게 영화시장에서 러시아영화가 자리매김하는 시기에 칸국제영화제의 트로피가 의미하는 지점은 이토록 크다. 황금종려상만 두번, 칸국제영화제의 트로피는 종류별로 모두 받아본 하네케 감독조차 인터뷰(다음호 기사에 공개할 예정)에서 “세 번째 수상을 기대하냐”는 질문에 “신경 안 쓴다고 말하면 그건 위선적인 것일 테다. 상을 받으면 결국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니까”라는 말을 했다. 영화가 곧 마켓으로, 마켓이 곧 자국 영화산업의 근간과 직결되는, 칸국제영화제에서 트로피의 중요성은 이렇게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 할 감독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래서 트로피의 향방은 어디로? 가와세 나오미 감독과 함께 칸국제영화제는 아직 린 램지, 소피아 코폴라, 두 여성감독의 작품 공개를 남겨두고 있으며, 먼저 공개된 마켓에서부터 호평이 자자한 프랑수아 오종, 세르게이 로즈니차 등의 신작 등 6편의 영화가 남아 있다. 어느덧 폐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영화제에서, 전세계 4500명의 저널리스트들은 긴 검색대 줄을 지나 마주치게 될 이변의 영화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p.s. 우크라이나 감독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어 젠틀 크리처>는 투옥된 남편을 찾아 러시아 곳곳을 떠도는 여성 이야기다.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극도의 리얼함이 그 어떤 판타지 장면보다 더 거짓말 같아 보이는, 이 기막힌 사회. 2시간23분 동안 단 세 마디의 대사가 전부. 바실리나 마코프세바의 여우주연상을 점쳐본다. 올해는 첫날 공개된 러시아영화 <러브리스> vs 후반에 공개된 우크라이나 감독(제작 프랑스)의 영화 <어 젠틀 크리처>의 대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크루아제트 대로를 떠들썩하게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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