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의 채팅창이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첫 장면부터 <해피 엔드>는 ‘미하엘 하네케의 것’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영화다. <아무르>(2012)의 아버지(장 루이 트랭티냥)와 딸(이자벨 위페르)이 다시 만난 것 같지만, 이전만큼의 심각함과 스릴을 기대하기 어렵다. 영화는 난민들이 거쳐가는 프랑스 칼레 지역을 배경으로 말썽 많은 한 부르주아 가족의 소동극을 그린다. 몇년 전 아내와 사별한 아버지 조지(장 루이 트랭티냥)와 부동산 중개업자 딸(이자벨 위페르), 두번 결혼한 의사 토마스(마티외 카소비츠), 조지의 12살 난 손녀딸 에브(판틴 하두인) 등 함께 살지만 각자 SNS와 소통하는 것이 전부다. 하네케의 영화 중 <미지의 코드>(2000) 이후 처음으로 칸에서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전에 없는 형식과 허점이 엿보이는 다소 귀여운 캐릭터들이 함께 모인, 제목만큼 ‘해피 엔드’한 영화다. 5월 23일 프랑스 칸 마제스틱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아무르> 이후 5년 만의 신작이다.
=시나리오는 두달 만에 썼다. 서술 작법에 관한 문제인 것 같은데 여러 이야기들이 평행적으로 진행되는 작품은 시나리오 쓰기가 조금 어렵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1994)을 쓸 때와 비슷했다. 하나의 이야기를 다른 이야기와 연결해야 하는데, 좀 어렵다. 물론 이런 어려운 부분이 시나리오 쓰기에 즐거움을 주는 것 같긴 하다.
-인물들이 쓰는 스마트폰 화면, 채팅 화면 등으로 화면을 꽉 채우는 파격적인 형식을 취했다. 화면비율도 스마트폰에 맞춰져 있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세로의 스마트폰 액정 비율로 맞춘 것도 놀라웠다. 당신도 세로로 SNS를 하나.
=당연히 한다. 아니라면 내가 이 문제에 관해 쓸 수 없었을 거다. 아이폰도 있고. 그게 없으면 요즘 세상에서 일을 할 수가 없다. 페이스북은 하지 않지만 페이스북으로 어떻게 소통하는지, 스냅쳇은 어떻게 하는 건지 안다. 어젠다 앱으로 약속 같은 것도 정리하고. 하지만 강박적으로 거기 집착하지는 않는다. 이런 소재를 다루려면 당연히 면밀한 조사를 한다. 사람들은 내가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을 신기해하지만 기술이나 장비는 스토리를 위한 도구일뿐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 모두 스마트폰, 컴퓨터를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냉담하다. 기술이 발달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그게 우리의 삶을 더 나빠지게 한다고 생각하나.
=나빠지게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소통은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그렇지 않나. 예를 들어 카페에 커플이 들어오면 둘이 대화하는 게 아니라 각자 스마트폰을 꺼내서 뭔가 소통을 한다. 그게 현실이다. 사람들의 삶이 더 나빠졌다고 나무랄 수 없다. 단지 기술 발전에 사람들이 압도된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버렸고, 이후 20년간 얼마나 큰 변화가 올지 알 수 없다. 지금 현재의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변화된 모습들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가족은 위기에 처해 있다.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고, 소녀는 어른처럼 행동한다. 어머니는 여타 어머니와 다르고, 아들과의 관계도 수월치 않다.
=이 영화는 일종의 소극이다. 자연주의적이거나 사실주의적인 영화가 아니다. 좀더 예리하고, 좀더 도발적이다. 이런 신경증적인 형태를 가진 가족은 실제로도 많은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가족이 생겨나게 된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 가족이 우리 사회의 어리석음의 총체 같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 각자가 이 사회의 일원인 것이다.
-난민 위기를 비롯해 빈부 격차까지 사람들은 ‘완전한 위기 상황’에 살고 있다. 당신의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답변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이 사회의 일원이라 내가 이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뭘 변화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책 하나, 영화 한편이 많은 변화를 불러올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영화와 책들이 약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비관주의자라면 영화를 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면 영화를 찍지 않았을 거다. 차라리 다른 것을 했겠지.
-비관주의자가 아니라면?
=리얼리스트!
-장 루이 트랭티냥은 은퇴를 선언했었는데, 캐스팅하는 데 어렵지 않았나.
=그는 공개적으로 더이상 영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단, 나와의 작업은 빼고. 그래서 그 기회를 잡아야 했다. 이번 작품은 그를 위해 시나리오를 쓴 것이기도 하다.
-어떤 도시에서건 이런 문제는 있을 텐데. 왜 하필 칼레에서 찍었나.
=장 루이 트랭티냥이 프랑스 사람이니까. (웃음) 장난이 아니라 진짜다. 이 영화는 독일, 오스트리아 어디에서도 찍을 수 있다. 어디든 같은 상황이니까. 장을 비롯해 이자벨 위페르까지 배우들 때문에 프랑스에서 찍게 된 거다.
-하지만 칼레가 가진 상징성이 있다. 칼레는 난민들이 프랑스까지 와서 영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가는 곳이다. 프랑스 정부가 지난해 칼레 난민촌을 폐쇄하기도 했고.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의 드레스킬도 칼레와 같은 이유로 유명한 곳이다. 유럽에는 어디에나 그런 곳이 있다. 이 영화는 프랑스에 대한 영화도 아니고 유럽에 대한 영화도 아니다. 차라리 부국과 빈국의 관계에 대한 영화일 거다. 굳이 영화를 어떤 시스템에 따라 환원한다면 그렇다는 거다.
-이번 작품은 당신의 이전 작품들의 서머리 같다.
=물론 내 영화는 항상 같은 테마를 가지고 있다. 내가 사는 인생도 하나뿐이고, 그 인생을 이용해서 영화를 찍지 않나. 그래서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것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별로 바뀌지는 않는다. 나이가 어느 정도 먹게 되면 그렇게 된다. (웃음)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내가 살았고, 나도 그런 사람들에 속한다.
-사람들이 어떤 영화를 “미하엘 하네케적이다”라고 하는 것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
=그걸 정의하는 것은 비평가들의 몫이다. 물론 영광이다. 어떤 작가가 어떤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뭔가 잘 이해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내가 찍은 영화 중 어떤 것도 일부러 특정 스타일을 만들어내고자 찍은 것은 없다. 매번 새로운 영화를 기획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하는 방법은 무엇을까 자문하면서 만든다. 절대 스타일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목적은 언제나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장 응축적으로 하는 데 있다. 내 생각엔 모든 감독들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하는 데 있어 관념을 경계한다. 관념은 언제나 곧 진부해지고 또 너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해피 엔드>라는 제목이 아이러니한데,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나.
=그냥 그런 영감이 떠올라서다. 좋은 제목 같았다. 물론 아이러니한 제목이긴 하다. <퍼니 게임>(2007)이라는 제목을 지었을 때와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퍼니 게임이 ‘퍼니’한 만큼 이 영화도 ‘해피’하지 않나. (웃음)
-<하얀 리본>(2009), <아무르>에 이어 세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을 기회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개인적인 소감은 어떤가(시상식 전 진행한 인터뷰라 칸 현지에서는 이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편집자).
=세 번째는 받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전례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경쟁부문에 출품되었으니 놀라게 하고는 싶다. 내가 신경쓰지 않는다고 하면 그건 위선일 것이다. 상을 받으면 어찌되었건 영화 홍보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래도 별로 긴장은 안 된다. 사실 여기서 받을 수 있는 상은 거의 다 받았고, 그래서 좀 편안한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