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감독에게 여성은 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화두다. 4·3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제주도 할머니(<비념>(2012)), 40여년 전 구로공단에서 청춘을 바쳐야 했던 여공들(<위로공단>(2014))은 한국 현대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다. 그의 신작 <려행>의 주인공인 김복주, 이윤서, 강유진, 양수혜, 김미경, 한영란, 김광옥, 김경주 등 탈북 여성들 또한 그렇다. 탈북 사연이 저마다 다르지만, 임 감독은 “남한이든 북한이든 사람들이 보고 겪은 감정은 똑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시회 <포스트트라우마>(주최 김근태재단, 서울문화재단)에 참여한 26분짜리 영상 <북한산>이 <려행>의 출발점인데.
=<북한산>은 한복을 차려입은 탈북 가수 김복주씨와 북한산을 오르며 그의 탈북 사연과 탈북 이후 삶을 이야기하는 프로젝트였다. 4·3 사건(<비념>)이든, 노동문제(<위로공단>)든 항상 분단문제가 연결되어 있어 기회가 되면 한번은 분단문제를 이야기해야겠다 싶었다. 마침 김근태재단으로부터 참여 제안이 와서 시작하게 됐고, 김복주씨로부터 통일이나 남북문제에 대한 생각을 들으며 많이 공감했다. 그러면서 (탈북 여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2016년 10월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APAP)에 참여하면서 <북한산>의 주제를 확장해 기획한 작품이 <려행>이다.
-이윤서, 강유진, 양수혜, 김미경, 한영란, 김광옥, 김경주 등 출연한 탈북 여성들이 인터뷰를 흔쾌히 허락하던가.
=내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어느 정도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야 하는 이야기니까. 한국 사회에서 통일문제나 탈북문제가 특히 방송에서 왜곡돼 전달되는 부분도 있어서 촬영 전 이들을 만나 이 이야기를 하려는 목적과 방법을 충분히 설명했다.
-영화는 그들에게 고향에 대한 추억, 탈북 사연, 남한에서의 삶 등 누구나 궁금하고 공감할 만한 질문을 던지는데.
=남한이든 북한이든 사람들이 보고 겪은 감정들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고, 우리는 같다는 느낌을 가지고 질문하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북한 주민들이 보고 겪었던 감정들은 어떤 것일까. 그걸 듣고 싶었다.
-저마다 사연이 다른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나.
=분노가 가장 컸다. 북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서 탈출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그 순간 여성의 몸으로 힘들고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잖나. 이건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남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연들이 굉장히 많아 화가 났지만, 현재진행형인 문제라 관객에게 무겁지 않게 전달하려고 했다.
-인터뷰 사이에 탈북 여성들이 산이나 강으로 가는 판타지나 퍼포먼스 같은 장면이 등장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이 중요해졌는데 그들이 생각하는 자연의 풍경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생계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반면, 우리에게 자연은 여가를 보내는 공간의 개념이 조금 더 많지 않나. 또 이들의 이야기와 생각을 들으면서 이들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퍼포먼스가 나오게 됐다. 공간을 남한인지 북한인지 구분하기 힘들게 표현하고 싶었고, 산이나 강으로 가면서 탈북 경로든 고향에 대한 생각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복주씨의 경우 산행을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께 제사를 드리고 싶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었다.
-다음 작업은 무엇인가.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이란-이라크전쟁을 겪은 세 여성의 과거와 현재를 다룬 <환생>을 편집하고 있다. 12월부터 2018년 4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인전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을 연다. 해방 전후를 경험한 할머니 네분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단절되고 잊힌 것들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