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사랑이 누군가를 구원한 적은 없다
2018-02-08
글 : 문강형준 (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 정원교 (일러스트레이션)

이미지는 말을 한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두 개의 사랑>의 첫 장면은 주인공인 클로에가 긴 머리를 싹둑싹둑 커트‘당하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마침내 그녀는 카메라와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클로에의 자궁이 클로즈업되고 뒤이어 외음순이 화면을 채우는데, 이것이 그녀의 눈매와 정확히 겹쳐진다. 이 첫 장면에서 등장한 머리카락과 성기는 이후에 외음순을 닮은 목젖의 떨림, 정신분석가의 대기실에 있는 (여성의 질과 닮은 꽃모양을 가진) 호접란, 그녀의 배에 남은 수술자국과 겹쳐진다. ‘클로에’(Chlo )라는 이름은 ‘생식력(fertility), 꽃의 만개(blooming)’를 뜻한다. 클로에가 일하는 미술관에는 ‘피와 살’이라는 이름의 전시가 열리는데, 작품들은 인간의 살덩이가 프랜시스 베이컨식으로 뭉개져 있다. 그 뭉개진 살덩이는 클로에의 배 속에 있었던 혹(죽은 태아)과 닮아 있다. 이 육체의 이미지들은 모두 ‘여성적’이다. 클로에가 하지 못하는 말을 이미지들이 말한다. 모든 불안의 근원은 바로 내 몸이라고. 내 몸의 잘려나간 곳들, 벌어져 있는 곳들에서 뭔가가 자라나고, 뭔가가 터져나온다. 내면의 불안이 소리를 지른다. 남자가 탄탄한 외부 근육으로만 자신을 전시하려 할 때, 여자는 자기 몸 안의 모든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생명의 잉태이며, 이것은 때로 말할 수 없는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정신은 바깥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때로는 역사로(헤겔), 때로는 자본주의로(베버), 때로는 몽상과 신경증으로(프로이트). 영화 서사의 대부분은 클로에의 몽상이다. 그녀는 겉으로 표출하는, 그러니까 인정받는 욕망과 더불어 안에만 있는, 말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진다. 그녀의 고양이 밀로가 안에 있다 밖으로 나가버리듯, 클로에의 숨겨진 욕망도 밖으로 나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자신의 다정한 애인에게 폭력적이고 독재자 같은 쌍둥이 형이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녀는 둘 모두와 관계를 가진다. “당신과 있을 땐 그를 생각하고, 그와 있을 땐 당신을 생각해요.” 완전히 상반된 쌍둥이 형제와의 ‘두 개의 사랑’은 결국 그녀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신, 자신이 태아 상태로 먹어버린 쌍둥이 여동생 산드라가 외화된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만든 쌍둥이 형을 죽인 후, 배 속에 있는 그녀의 쌍둥이 여동생도 수술대 위에서 제거된다. 하지만, 과연 진정 제거되는 게 가능할까?

남겨진 것은 제거된 혹이 아니라, 결코 제거되지 않은 욕망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어쩌면 그것은 이제 더욱 심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이 영화의 ‘쌍둥이’는 분열된 자신이다. 우리는 대개 내 속에 다른 나, 제거하고 싶은 혹을 달고 살면서도, ‘나’는 분열되어 있지 않은 건강한 유기체라 믿는다. 그 믿음은 틀렸다. 사랑은 합일의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환상이다. 자신이 타자를 끝내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로에의 엄마가 말하듯, “사랑이 누군가를 구원한 적은 없다”. 만약 구원이라는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타자를,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끝내 알 수 없고, 소유할 수 없음을 겸허히 인정할 때, 그 겸허함의 공백 속에서야 비로소 가능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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