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쓴 자신의 소설들을 읽는 일에는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것은 참 이상하고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오정희 작가의 문학 50년을 맞이해 출간된 전작 개정판 <오정희 컬렉션>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오정희는 위와 같이 썼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그의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국문과 출신 독자에게도 어느 만큼은 용기가 필요했다. 갓 대학에 입학한 10여년 전, 합평 시간이었다. 신입생다운 패기와 미문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잔뜩 묻어나는 문체, 소설인지 싸이월드 일기장인지 모호한 여학생의 첫 단편소설을 한 남자 선배가 이렇게 평했다. “네가 오정희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이건 오정희도 뭣도 아니야. 여류 소설 그만 보고 서사 강한 걸 많이 봐라.” 여성 작가들은 서사가 약한 자기고백적인 사소설을 많이 쓴다는 편견이 그 속에 있었다. 신입생이 19살, 그 선배 나이도 고작 스물대여섯이었으니 어린 문청들 사이에 있을 법한 흔해빠진 에피소드다. 아마도 그 남자 선배는 오정희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읽은 오정희의 소설에는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불안, 가지지 못한 것만 탐하고 주어진 것은 버리고 싶은 인간의 부조리, 전후 빈곤 속에서 소외받은 아이들과 여성들의 삶이 겹겹으로 쌓아올려져 생생한 공간 속에 틈입하고 있었다. 이것이 강렬한 서사가 아니면 무엇이 서사인가. 그는 오정희를 오독했다. 한때 문학도였다면 오정희 이름 석자에 소환되는 풍경과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혹은 글을 쓰고 싶은 이들은 죄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자랐고 질투했고 결국 도달하지 못한 채로 쓰고 있다. 1968년 <완구점 여인>으로 등단한 오정희의 1970년대 소설을 묶은 <불의 강>, 그의 소설 중 가장 널리 읽힌 <유년의 뜰>과 <중국인 거리>가 수록된 작품집 <유년의 뜰>, 주로 중산층의 허위와 우울을 응시했던 80년대 후반의 작품집 <바람의 넋>, 주로 여성의 공허함을 그린 90년대작 <불꽃놀이>, 오정희의 첫 장편소설 <새>까지 총 5권이 실린 <오정희 컬렉션>은 이미 오정희 소설이 한권쯤 서가에 꽂힌 사람이라도 구비해야 할 소설집이다.
오독의 발견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끄자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문을 막아선 아버지의 땅땅한 몸피와 검게 번들대는 가죽 잠바에 묻어온 쇳내 나는 찬 공기는 스산히 저무는 오후 늦은 점심상의 묵은 김치 냄새와 담배 냄새로 절어 있는 방 안 정경을 남루하게 가라앉히며 단번에 방을 가득 채웠다. 아무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꺼지는 것과 함께 문득 감지된 그 침묵은 돌연하고 이상스러웠다. 정지된 화면처럼 큰어머니는 입을 벌린 채, 큰아버지는 안경을 벗던 손짓 그대로 우리의 등 뒤로 불투명하게 흐르던 오후의 흐름 속에 잠시 붙박였다. (<새> 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