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굳이 분류하자면 인문 에세이쯤 되겠다)인 이 책의 출발은 조금 충격적이다. 친구와 전화 통화 중에 “죽고 싶다”고 한 저자의 집에 경찰이 출동하고, 제사 크리스핀은 경찰에게 자신이 지금 얼마나 멀쩡한지를 설명한다.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내 인생은 정말로 내 것인가, 아니면 남이 나를 위해 골라준 것인가? 이 모든 게 정말 나답긴 한가? 이런 질문들이 내 존재를 잠식해나갔고 마침내 나의 성채는 몇번이고 절망으로 붕괴했다. 나는 이년에 한번씩 정확히 똑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다시 지어나가다가 그 성이 파도 한번에 쓸려나가는 걸 보고 망연자실하기를 반복했다. 달리 사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11쪽) 이런 생각들이 뒤섞인 서른이라니, 이건 내 얘기잖아! 사실 ‘서른에 우울증을 겪은 저자가 유럽으로 떠나 존경했던 명사들의 공간들을 찾아다닌다’는 줄거리에는 별 매력을 못 느꼈다. 누구나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누구나 유럽의 각 도시로 훌쩍 떠날 수는 없다. 수입(푼돈이라며!)으로 시카고에 아파트 월세를 내고 비행기삯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그녀의 여행기가 투정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실패로 귀결된 자살 시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 나선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었다. 시대적 이유로, 운이 없어서, 원하는 대로 살 수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끝내 불행했던 작가들을 크리스핀은 찾아 나선다.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못한 그녀들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헤쳐나왔는지를 기록했다. 이 책에 매력을 더하는 것은 ‘선배들’을 대하는 크리스핀의 유머러스하고 예리한 태도다. 그녀는 찬양의 태도만을 견지하지 않고 때론 비꼬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르포르타주 <검은 양과 회색 매>의 저자 리베카 웨스트를 평가하는 대목이 압권이다. 위트가 넘쳐흐르며 매사가 조금은 꼬여 있는 크리스핀 스타일로 그녀에게 말해야겠다. 당신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다면 <죽은 숙녀들의 사회>를 못 읽었을 텐데,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거든.
어머니는 왜 야망을 품으면 안 되는가
아버지는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앞장서서 거친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던가. 약간의 거리는 당연하며 필수적이다. 반면 어머니는 우리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넘어질 때마다 잡아주거나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위안이 필요한 순간 어깨를 내주는 사람이다. 그렇게 배웠기에 어머니는 딱 두 발자국만 앞서 걸어도 자식을 버린 이기적인 년이 된다.(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