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사진을 토대로 미술을 넓혀갔다.” <허스토리>의 미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시대배경도, 특정 자료도 아닌 문정숙(김희애)의 캐릭터 그 자체였다. “소신과 뚝심을 가진” 문정숙이라는 걸출한 여성의 이미지가 이나겸 미술감독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정숙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사진도 영향이 컸다. 사진 속 그는 왠지 “부산 사람답게 스트레이트한” 인상을 줬다. “일례로 영화상에서 남편의 부재가 전혀 부각되지 않는 것처럼” 문정숙의 기죽지 않는 스타일과 화려함은 공간 미술에도 스며들어 있다. 영화 초반의 주요 공간인 대한여행사와 정숙의 집은 생기 있는 색감으로 가득 차 있고, 이는 자연히 문 사장의 경제력까지 보여준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진행된 관부 재판의 실화를 다룬 영화는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수차례 반복해 오간다. 중요한 건 한국과 일본으로 잘게 쪼개지는 영화의 내러티브를 미술적으로도 확연히 구분짓는 것이었다. 이나겸 미술감독은, 문정숙의 공간은 “그린과 화이트를 강조”한 반면 법정과 변호사 사무실, 그리고 할머니들이 숙박을 하는 료칸 같은 일본의 주요 공간은 “일괄적으로 어두운 우드 톤을 가미했다”.
특히 법정은 처음으로 자기 생애를 공개하는 할머니들의 고통을 꾹꾹 눌러담는 공간이다. “차갑고 답답한,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바위 같은 느낌”이 필요했다. 이나겸 미술감독은 “꾸며내지 않고도, 공간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보여주는” 방법을 고민했다. 해답은 창문에 있었다. <허스토리>의 법정 장면의 창문은 다른 건축물과 비교해 상단에 위치해 있다. 한마디로 할머니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이다. “빛이 들어오기는 하되 낭만적으로 쓰이지 않기를 바란” 결과물이었다.
한편 료칸은 세트로 대체할 수 없는 공간이었을 테다. 외부에서 보기에도 완벽한 일본식 건축물이 필요했던 <허스토리>팀은 부산에 하나 남은 오래된 일식 건축물을 발견했고, 빈방에 가구를 채워넣어 마치 할머니들의 탈의실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디테일을 살피면 놀라운 것이 또 하나 있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회의 장면에도 테이블마다 작고 오래된 찻잔이 올려져 있다. 이나겸 미술감독은 고증을 위해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을 찾은 김에 일본 곳곳의 중고숍에서 직접 빈티지를 구했다. 꼼꼼한 미술엔 그보다 몇배의 수고가 숨겨져 있는 법이다.
이나겸 미술감독_ <화차>(2011), <더 킹>(2016) 등의 미술감독으로 활동했다. 최근 이권 감독의 <도어락> 촬영을 마쳤고, 현재 이계벽 감독의 <힘을 내요, 미스터 리>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