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위안부 소재의 영화들 그 이후를 말하는 <허스토리>의 의의
2018-06-20
글 : 송경원
고통의 재현보다는 현재를 조명하는 영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닙니다. 카메라에 허락된 건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리는 겁니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그다음입니다.” <쇼아>(1985)의 클로드 란즈만 감독은 홀로코스트를 영화의 소재로 삼았다는 비난에 대해 이와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첼모 수용소, 트레블링카 집단처형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그리고 바르샤바 게토까지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이 건조한 다큐멘터리는 과거를 재현하거나 조작하려는 일말의 움직임도 없이 지금(그러니까 1980년대)의 흔적들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혹자는 홀로코스트가 너무 많이 소비되었다고도 한다. 인류사의 거대한 비극은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똑바로 바라보자. 우리에겐 여전히 이 비극과 과오를 되새길 책임이 있다. 홀로코스트는 너무 많이 소비된 게 아니라 제대로 이야기된 적이 없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의 종군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에 관한 영화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하고 싶다.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몇년 사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제법 나왔다. 이나정 감독의 <눈길>(2015)이 제작된 지 2년 만에 관객을 만날 수 있었고, 조정래 감독의 <귀향>(2016)이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2017)로 이야기를 보태어 다시 개봉했으며, 나문희 배우가 주연을 맡은 <아이 캔 스피크>(2017)도 의미 있는 반향을 불러왔다.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 <그리고 싶은 것>(2012), <소리굽쇠>(2014) 등 다큐멘터리나 독립영화 진영에서는 위안부의 아픔을 꾸준히 놓치지 않고 따라가고 있다. 꼭 위안부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류승완 감독의 <군함도>(2017) 속 말년(이정현)의 에피소드처럼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에서는 이 비극과 만행을 어떻게든 기억하려 애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피로감을 표시하기도 하고 위안부 문제를 이슈를 모으기 위한 소재로 삼는 건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다시 단언하건대 위안부 문제는 지치거나 지겨워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모자라고 아무리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도 미흡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겐 여전히 제대로 된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규동 감독의 <허스토리>는 기존의 위안부 소재 영화들과 다른 각도에서 한 발짝 나아간 형태를 보여준다.

영화는 관부 재판에 대한 간단한 자막으로 시작된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 증언하는 기자회견을 가진 뒤 사회적 반향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정신대 신고전화가 개설되고 이어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에서 부산지역에도 신고전화를 개설했다. 여기에 자신의 사연을 알려온 할머니들이 모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피해보상 소송을 제기한다.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장작 6년에 걸친 재판에서 할머니들은 총 20회가 넘는 구두변론을 진행했으며 그때마다 시모노세키 지방법원과 한국을 오가며 진실을 토해냈다. 그 결과 위안부 관련 재판 사상 처음으로 일부 보상판결을 받아내 일본의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받았다. 물론 이건 온전한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일본 정부는 이후 즉각 항소를 이어갔고 2001년 히로시마 고등재판소에서 패소했으며 2003년 일본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되었다. 그렇기에 이 투쟁의 기록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허스토리>는 관부 재판으로 자신들의 사연을 직접 알리고 일부나마 일본 재판부의 양심까지 흔든 할머니들, 그리고 이를 도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끄집어낸다.

그다음을 이야기하다

지고는 못 사는 워커홀릭 문정숙(김희애)은 부산의 한 여행사를 책임진 여성 경영인이다. 부하직원의 잘못으로 영업정지를 당한 정숙은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의 제안을 받아 빈 사무소에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신고전화를 개설한다. 처음에는 의무감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할머니들의 사연을 들을 때마다 분노가 치밀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자신의 집에서 오랫동안 집안일을 도왔던 배정길 할머니(김해숙)가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숙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들을 위한 투쟁에 뛰어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국정부와 수치스런 역사를 묻어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 정숙은 상황을 반전시킬 승부수를 건다. 바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직접 재판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재일교포인 이상일 변호사(김준한)의 도움을 받아 배정길, 박순녀(예수정), 서귀순(문숙), 이옥주(이용녀) 할머니와 함께 부산과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을 오가는 길고 긴 재판을 시작한다.

<허스토리>는 종전의 위안부 소재의 영화와 달리 ‘그다음’을 이야기한다. 그동안에는 주로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한 상처와 비극을 재현하는 데 힘을 쏟았던 게 사실이다. 워낙에 거대한 비극 앞에 우선 이를 알려야겠다는 조바심이 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자들이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비극의 재현은 신중해야 할 문제다. <허스토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재현하는 대신 그분들이 얼마나 열심히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여전히 자신들을 알리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비극, 그다음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큰 맥락에서는 <쇼아>에서 보여줬던 거리를 둔 시선이라고 해도 좋겠다. 이에 따라 <허스토리>는 할머니들의 아픈 과거를 굳이 이미지로 재현하지 않는다. 영화가 허락하는 건 법정에서 할머니들이 그 기억을 본인의 입으로 다시 토해내는 반응 정도다. 사실상 우리가 이 거대한 비극에 대해 목격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 해도 좋겠다. 비극을 전시하는 대신 그다음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의지를 비춘다는 것. 어렵지만 필요한 시도. <허스토리>의 가장 어여쁜 지점이다.

전반적인 만듦새도 매끄럽다. 그중에서도 중반부까지의 빠른 호흡은 꽤 인상적이다. 장면장면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끊고 넘어가는데 이는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에 생기를 부여한다. 이렇게 아껴 모은 시간을 더해 후반부 법정에서 토해내는 할머니들의 사연에 정성을 다한다. 여기에 1990년대를 재현한 꼼꼼한 미술, 김희애와 김해숙을 비롯한 배우들의 내공 있는 연기가 더해지면서 생생한 무대 위로 관객을 초대한다. 특히 흠잡을 데 없는 배우들의 사투리 연기는 일품이다. 영화는 절제하고 거리를 두는 한편 관객을 고양시켜야 할 땐 확실한 선택을 하는데 법정에서의 격정적인 진술, 이를 통역하는 문정숙의 숨길 수 없는 감정, 핀 포인트처럼 내리꽂는 극적인 조명이 결합하여 그야말로 역사의 무대를 만들어낸다.

서사적 뼈대만 보자면 <허스토리>는 문정숙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 할머니들의 재판에 매달리느냐는 친구 신 사장(김선영)의 질문에 정숙은 이렇게 답한다. “부끄러버서. 내 혼자 잘 먹고 잘 산게.” 그러곤 쑥스러운지 바로 이어 말한다. “…는 아니고 아직 못 이겼으니까. 마, 이길 때까지 해봐야지!” 어쩌면 둘 다 진심일 것이다. 문정숙은 자존감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이다. 그녀가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치를 떠는 건 사람이라면 응당 해야 마땅한 분노다. 핵심은 그다음이다. 지기 싫어하는 문정숙은 어떻게든 이 재판을 이겨서 할머니들이 정당한 보상과 사과를 받길 바란다. 하지만 이상일 변호사와의 첫 만남에서 일부 인정하듯 정숙 역시 알고 있다. 이게 이길 수 없는 싸움일지도 모른다는 걸. 그럼에도 이 길고 긴 투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는 정숙과 할머니들의 끊임없는 교감을 통해 그 근거들을 조금씩 쌓아나간다. 역사를 알고 함께 간다는 건 그런 것이다.

<허스토리>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딸에게 신경 좀 쓰라는 친구의 조언에 “내는 일이 좋고 일하면 즐겁다. 그게 내다. 내가, 내 아닌 척하고 살 순 없다 아이가?”라는 정숙의 말은 우리가 삶에 대해, 혹은 이 문제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를 짚어준다. 피해자가 피해자가 아닌 척 살아야 하는 세상은 잘못된 것이다. 그렇기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제대로 된 해결이 되기 전까진 계속 스크린에서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고 우리는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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