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⑥] 부산의 한국영화 신작들, 10대 소녀의 삶에 주목하다
2018-09-26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
[부산국제영화제⑥] 부산의 한국영화 신작들, 10대 소녀의 삶에 주목하다
<계절과 계절 사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일 한국영화 가운데 올해 유독 눈에 띄는 특징은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영화가 많다는 점이다. <벌새> <선희와 슬기> <영주> <영하의 바람> <보희와 녹양> <나는보리> <계절과 계절 사이> 등이 이런 계열에 속하는데 소녀들의 이야기라고 다 비슷한 것은 아니다. <벌새>는 사랑을 갈구하는 중학생 소녀를 그린 작품인데 1994년 성수대교 붕괴라는 실제 사건과 미묘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부모는 바쁘고 오빠는 폭력적이며 언니는 바깥으로 나도는 어느 가족의 막내인 소녀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갈구하지만 세상은 소녀의 소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영화는 우리가 청소년기에 경험한 일들을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반면 <선희와 슬기>의 소녀는 또래 집단에 끼고 싶은 여고생이다. 소녀는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거짓말을 하는데 그것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는다. 친구의 자살을 계기로 소녀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도한다.



<보희와 녹양>

1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여성감독들의 작품들



김향기, 김호정, 유재명 등이 출연하는 <영주>는 소녀 가장이 된 소녀가 주인공이다. 남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소녀는 아직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지만 남매의 부모는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소녀는 교통사고의 가해자를 찾아가는데 오히려 그곳에서 자신을 보살펴줄 사람들을 만난다. 용서와 화해는 이뤄질 것인가? <영하의 바람>은 이혼한 뒤 새 아빠와 살게 된 소녀의 이야기다.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잘 살아보려는 어머니의 바람과 소녀의 행복은 어느 날 갑자기 산산조각난다. 영화는 비로소 처음 혼자 세상과 맞서게 된 소녀를 그린다. <보희와 녹양>은 소녀가 아니라 소년 보희가 주인공이지만 보희의 여자친구 녹양이 중요한 인물이기에 비슷한 계열의 영화로 보인다. <보희와 녹양>에서 흥미로운 것은 소년의 캐릭터를 남자다움과 거리가 먼 인물로 묘사한 점이다. 소녀인 녹양이 오히려 소년의 보호자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남녀 구도를 유지하면서 소년과 소녀는 소년의 친아버지를 찾기 위한 모험을 떠나고 그 과정에서 한뼘 훌쩍 자란다. <나는보리>는 청각장애를 지닌 부모와 남동생과 살고 있는 11살 소녀의 성장을 그린 영화다. 가족 가운데 유일하게 듣고 말할 수 있는 소녀는 ‘소리를 잃고 싶다’는 소원을 빌게 된다. 요즘 보기 드문 착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계절과 계절 사이>는 동네에 새로 카페를 연 30대 여성을 사랑하게 되는 여고생을 그린다. 소녀는 성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데 영화는 소녀가 선망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동성애 너머의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이처럼 다양한 소녀들의 이야기가 쏟아진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주류 한국영화가 남자들의 이야기, 액션 스릴러에 치중하는 동안 억눌렸던 것이 폭발하듯 소녀들의 영화가 쏟아져나왔다. 올해 나온 한국영화 신작 가운데 여성감독이 만든 작품이 많다는 것도 그 이유가 된다. 뉴 커런츠 한국 작품 3편 가운데 2편,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 10편 가운데 5편이 여성감독의 영화다. 아울러 소녀가 아니라도 여자주인공이 돋보이는 영화가 많다. <호흡>은 12년 전 유괴사건에 연루됐던 여자가 피해자였던 소년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윤지혜는 절망과 죄책감 속에 깊은 어둠을 안고 살고 있는 여자를 연기한다. 최근 토론토국제영화제 디스커버리 부문에 초청됐던 <아워바디>는 파격적인 영화다. 여성의 몸과 성적 자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배우 최희서는 <박열>(2017)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준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수영이 주연을 맡았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를 만나러 일본 나고야에 갔던 여자는 남자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실의에 빠진 여자는 나고야의 어느 뒷골목 게스트하우스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발견한다. <속물들>의 여자(유다인) 또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다. 표절을 차용이라 우기는 여자는 출세와 욕망을 위해 뭐든 할 준비가 된 사람이다. 남자친구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쯤 거리낌없지만 그녀만이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다. <속물들>은 겉과 속이 다른 인간 군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편 몇편의 영화는 기발한 설정 자체가 흥미를 자극한다. 박용우, 조은지 주연의 <빵꾸>는 장사가 잘 되지 않는 국도변 카센터를 운영하는 부부의 이야기다. 근처 공사장을 오가는 트럭이 흘린 금속 조각 때문에 지나가는 차의 타이어가 펑크나자 타이어를 갈아서 돈을 벌게 된 다음, 부부는 일부러 타이어 펑크를 내는 위험한 도박을 하게 된다. 손병호 주연의 <멀리가지마라>는 3남1녀가 20억원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데서 시작한다. 큰형의 몫이 많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전화가 울리고 큰형의 아들을 유괴했으니 20억원을 내놓으라는 유괴범의 협박이 흘러나온다. 가뜩이나 자기 몫이 적은 것에 불만인 형제들은 선뜻 자기 몫의 유산을 내놓길 꺼리고 영화는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달려간다. 연극적 설정이 두드러지는 영화지만 연극적 요소를 창의적으로 활용한 사례다. 이주영, 구교환, 문소리 등이 출연하는 이옥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기> 역시 영화적 설정이 독특한 영화다. 성관계를 하는 병원 엑스레이 사진이 발견되고 사진 속 주인공이 자신이라 여긴 간호사가 사직서를 쓸 생각으로 출근을 한다. 그러나 병원 직원들이 한꺼번에 출근을 하지 않는 상황이 생기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난다.



<영주>

공연 <꼭두>를 영화 <꼭두 이야기>로



<오리의 웃음> <돌멩이> <기도하는 남자> <밤빛> 등은 남자주인공이 극을 끌고 가는 영화들이다. <오리의 웃음>은 옛 애인의 흔적을 찾아 나선 한 중년 남자의 여정을 따라간다. 남자는 이상한 여자들을 차례로 만나고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 놓인다. 남자가 겪는 여러 사건을 통해 영화는 남자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본다. 두려움과 죄책감이 지배하는 어두운 동굴 같은 그곳에서 남자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 <돌멩이>는 지적 장애를 가진 청년(김대명)이 소녀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비난받는 이야기다. 청년을 변호하는 신부(김의성)와 청년의 범행을 의심치 않는 쉼터 선생님(송윤아)의 대립은 우리가 요즘 사회에서 많이 목격하는 구도이다. <기도하는 남자>는 가난한 부부가 절실히 돈을 구하러 다니다 범죄의 유혹에 흔들리는 이야기다. 박혁권, 류현경이 부부로 등장하는데 그들의 기도에 대한 신의 응답은 기묘한 방식으로 이뤄진다. <밤빛>은 10년 전 헤어진 아들을 다시 만난 아버지를 그리고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산속에서 혼자 생활하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대하기가 어색하지만 2박3일 동안 같이 지내면서 잘 대해주려 노력한다. 단순하고 잔잔한 영화다.



이 밖에 <늦여름>은 두 커플의 엇갈리는 사랑을 조성규 감독 스타일로 담담히 보여주는 영화이고 김태용 감독은 지난해 국립국악원, 방준석 음악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공연 <꼭두>를 영화 <꼭두 이야기>로 만들어 국립국악원의 연주와 함께 1회만 특별상영한다.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와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선정된 장률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까지, 부산의 10월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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