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①] <가버나움> <애쉬: 감독판> <콜드 워> 外
2018-09-26
글 : 송경원

<가버나움> Capernaum

나딘 라바키 / 레바논, 영국 / 2018년 / 120분 / 아시아영화의 창

베이루트의 슬럼가에는 부모로부터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넘쳐난다. 출생 신분증도 없는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 12살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사람을 찌른 죄로 구속된 자인이 법정에서 자신의 부모를 고발하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자인의 증언을 통해 숨겨진 사연을 밝혀나가는 구성이지만 특별히 사건을 감추거나 추리를 유도하기 위한 구성은 아니다. 그보다 마땅히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 제도의 바깥에 방치된 채 고통받을 때 연민과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 자인은 동생들을 보호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돈을 받고 어린 여동생을 시집보내버린다. 격분한 자인은 가출하고 거리를 헤매다 불법이민여성의 도움을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젖먹이 아기를 돌보게 된 자인은 여성이 갑자기 사라진 뒤 아기를 끝까지 지키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제3세계의 비극을 재현하는 방식이나 약한 존재가 더 약한 존재를 보듬는 과정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두 아역배우의 존재감은 아쉬움을 덮고도 남음이 있다. 단순한 재현이나 관습적인 연기 이상의 울림을 던지는 눈빛이 장면마다 박혀 있는 놀라운 영화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애쉬: 감독판> Ash Is Purest White: DIreCtors’ Cut

지아장커 / 중국, 프랑스 / 2018년 / 136분 / 아시아영화의 창

탄광촌 출신의 차오(자오타오)는 강호의 리더 빈(리아오판)의 연인이다. 강호는 중국의 사회 격동기,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서로를 보호하고 생존하기 위해 꾸린 일종의 자경단 겸 폭력배 무리다. 차오는 빈을 지키기 위해 5년간 대신 감옥까지 다녀오지만 그사이 세상도, 빈도 변해버렸다. <애쉬: 감독판>은 차오와 빈의 질기고 기구한 인연의 연대기를 통해 중국의 급격한 변화 속에 유령처럼 떠도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잡는다. 지아장커는 최근 몇년간 장르영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 중인데, <천주정>(2013)이 지아장커가 해석한 무협영화의 변주였고 <산하고인>(2015)이 멜로드라마에 대한 지아장커의 화답이었다. <애쉬: 감독판>은 장르적으로 필름누아르 혹은 갱스터물의 외피를 빌려 중국의 급격한 변화 속에 재가 되어 사라져가는 것들을 어루만진다. 변화의 속도에 휩쓸린 사람들은 전통적 가치와 분리되기 시작하는데 누군가는 의리를 배신하고 누군가는 도태되는 가운데에도 차오만큼은 굳건하게 버티고 자신을 팔지 않으면서도 끈질기게 생존한다. 지아장커의 부인이자 영원한 파트너인 자오타오의 연기가 놀랍다. 한 여인의 일대기를 통해 하얗게 불태우고 사라져가는 것들을 애상하는, 거장의 묵직한 한 걸음.

<콜드 워> Cold War

파벨 파블리코브스키 / 폴란드, 영국, 프랑스 / 2018년 / 90분 / 월드 시네마

1940년 폴란드, 피아니스트 빅터(토마스 코트)는 공산화된 조국을 대외적으로 알릴 공연의 기획책임자로 부임한다. 빅터는 시골 마을에서 가수이자 댄서인 줄라(조안나 쿠릭)를 만나 단번에 매료되고 이후 두 남녀의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얼마 뒤 빅터는 베를린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며 줄라에게 함께 가자고 권한다. 하지만 가수로 성공하고 싶었던 줄라는 고국에 남고 이때부터 두 사람은 긴 세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콜드 워>는 냉전시대의 유럽을 배경으로 20년에 걸쳐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남녀의 애틋한 멜로드라마다. 거의 기하학적 강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프레임과 미장센에 공을 들인 이 영화는 매 장면 한폭의 정물화 같은 아름다운 화면을 선보인다. 특히 폴란드, 베를린, 파리 등 도시를 옮겨갈 때마다 장면의 접근을 달리해 고유한 공간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서사 자체는 관습적이고 무난하지만 이를 어떤 형식에 실어 표현할지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묻어난다. 71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레토> Summer

키릴 세레브레니코프 / 러시아 / 2018년 / 126분 / 오픈 시네마

1981년 레닌그라드는 음악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꿈꾸는 청춘들로 넘쳐난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목받던 마이크(로만 빌리크)는 영감과 활력이 가득 찬 젊은 뮤지션 빅토르 최(유태오)를 만난다. 록 음악을 금지하는 당국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최는 데이비드 보위, 레드 제플린, 비틀스,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 서구의 음악을 흡수, 자기식으로 소화해나간다. 한편 빅토르 최는 자신의 멘토이기도 한 마이크의 아내 나타샤(이이라 스타르센바움)와 서로 미묘한 감정이 피어남을 느낀다. <레토>는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창작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던 뮤지션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다. 창작의 희열과 삼각관계를 교차시켜 이야기를 한층 풍성하게 하는 동시에 형식적으로도 재기발랄한 접근이 눈에 띈다. 흑백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종종 MTV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이나 애니메이션, 컬러 영상 등을 삽입하며 기발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3가지 경계(실화/극화, 스크린, 흑백/컬러)를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접근은 관객을 청춘의 축제 속으로 끌어들인다.

<3개의 얼굴들> 3 Faces

자파르 파나히 / 이란 / 2018년 / 100분 / 아시아영화의 창

어느 날 유명 배우 베나즈 자파리에게 한통의 영상이 도착한다.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녀가 마을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절박한 상황을 호소하다 스스로 목을 매는 영상이다. 충격을 받은 베나즈 자파리는 소녀를 만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남편 자파르 파나히와 함께 시골로 향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이란에 억류된 후 만든 4번째 장편영화다. 자파르 파나히는 현재 해외로 나올 순 없지만 국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작업 중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드는 <3개의 얼굴들>은 이란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고발하는 선 굵은 메시지와 함께 자파르 파나히 특유의 형식미학도 엿볼 수 있다. 영화는 산골 마을을 벗어나지 못해 극단적인 일을 벌인 소녀, 여배우 베나즈 자파리, 그리고 마지막에 드러나는 제3의 얼굴까지 세 여성의 삶을 들려준다. 각기 다른 세대의 여성을 그리는 방식은 이란의 관습과 통념, 침묵에 저항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증거다. 풍자와 유머는 다소 덜하지만 단순하면서도 적절한 상징은 보는 이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절대 고요를 찾는 남데브 아저씨> Namdev Bhau In Search of Silence

다르 가이 / 인도, 우크라이나 / 2018년 / 84분 / 아시아영화의 창

남데브 아저씨는 피곤하다. 늘 붐비고 시끄러운 뭄바이에 완전히 지쳐버린 남데브는 문득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무런 계획이나 기약 없이, 오직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장소를 찾아 사람이 없는 오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지만 아무리 외진 곳까지 찾아가도 마치 신의 장난처럼 소음이 그를 쫓아다닌다. 그러던 와중에 붉은 성을 찾는다는 소년 알릭을 만나 원치 않은 동행을 하게 된다. 남데브의 지치고 퀭한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문을 여는 영화는 대사 한마디 없는 남데브의 얼굴을 꽤 오래 따라간다. 한마디 말이 없는 남데브는 충혈되고 멍한 눈과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을 지배하는데 이 무색무취의 얼굴이 다채로운 사운드의 습격과 맞물려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한 감정들을 쏟아낸다. 독특한 호흡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남데브가 소년과 짝을 맞춰 길을 떠나는 과정은 로드무비의 형식과 성장 영화의 서사가 적절히 결합되어 있다. 덕분에 예상 가능한 결말임에도 충분한 설득력을 확보한다. 침묵을 찾아 떠났던 게임이 마침내 평온에 도착하는 따뜻한 이야기다.

<행복한 라짜로> Happy as Lazzaro

알리체 로바허 /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독일 / 2018년 / 127분 / 월드 시네마

1980년대 이탈리아의 한 마을, 후작 부인이 운영하는 담배농장이 있다. 그녀는 고립된 지역의 마을 주민들을 속여 부당하게 노동력을 착취 중이다. 순박한 청년 라짜로 역시 그중 한명이다. 후작의 아들이자인 탕크레디는 마을 사람들의 어떤 부탁도 흔쾌히 들어주는 라짜로의 순수함에 호의를 느끼고 둘은 계급과 경계를 넘어 은밀한 우정을 나눈다. 어느 날 탕크레디는 라짜로에게 가짜 납치극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이를 돕던 라짜로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십수년 뒤 사람들이 라짜로의 존재를 잊어갈 무렵 예전 모습 그대로의 라짜로가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를 유령이라 두려워하지만 여전히 선하고 사심 없는 라짜로의 모습에 점차 마음을 연다. <더 원더스>(2014)를 통해 이탈리아영화계의 신성으로 거듭난 알리체 로바허의 신작.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감독의 시선은 우아하고 탄력적인 각본의 힘을 빌려 시간 여행이라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거듭났다. 리얼리즘과 환상주의가 절묘하게 결합된 신비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시대와 인간을 흥미롭게 성찰한다.

<붉은 남근> The Red Phallus

타쉬 겔트쉔 / 부탄, 독일, 네팔 / 2018년 / 85분 / 뉴 커런츠

부탄 내륙의 오지 마을에 사는 소녀 상가이는 이곳 생활이 지긋지긋하다. 상가이의 아버지는 영험한 힘을 지닌 목조남근상을 만드는 장인으로 지역 축제 기간에 직접 만든 가면을 쓰고 의식을 진행한다. 은퇴를 앞든 아버지는 자신의 역할을 물려줄 사람을 고르기 위해 상가이를 혼인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상가이는 자신을 무시하고 소유물처럼 여기는 남자친구나 마을의 억압적인 관습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붉은 남근>은 억압받는 여성이라는 분명한 주제를 남근이라는 선명한 상징으로 표현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1990)을 연상시키는 꿈속의 이미지로 문을 여는 이 영화는 목가적이고 평화로우며 탁 트인 부탄의 풍경과 억눌린 여성의 삶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길과 뒷모습의 영화라고 해도 좋은 이 작품은 클로즈업을 극도로 절제하고 뒷모습을 원경으로 포착해낸다. 단순 명료한 주제와 아름다운 이미지, 그리고 절제된 형식의 조화가 도드라지는, 한폭의 투명한 수채화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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