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필리핀영화 100주년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아 특별전을 마련했다. 지난 2009년엔 한국과 필리핀 수교 60주년을 맞아 ‘필리핀 독립영화의 계보학’이란 특별전을 마련해 총 14편의 영화를 소개한 바 있다. 마누엘 콘데, 리노 브로카, 에디 로메로 등 필리핀을 대표하는 거장부터, 당시 필리핀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브리얀테 멘도사와 라브 디아즈, 그리고 독특한 영화세계를 지닌 신예 작가로 소개된 라야 마틴의 영화들로 상영작을 구성해 필리핀 독립영화의 정신을 담아내려는 의도를 명확히 했었다.
‘국가(적)영화’라는 개념
10년 전의 특별전을 참고해, 이번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고민했던 지점은 필리핀영화 100년을 어떻게 조망할 것인가의 문제였는데, 필리핀영화 100주년을 준비하고 있는 특별위원회 소위원회와의 논의를 거쳐 ‘국가(적)영화’(National Cinema)라는 개념으로 100년을 관통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시 말해, 스페인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를 거치면서 지배적인 외국 문화들의 영향 아래 있던 필리핀 사회가 국가적 정체성을 고민하며 성장해온 과정을 어떻게 영화의 역사가 반영해왔고 자양분으로 삼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조감도를 그려보기로 하였다. 이러한 기조 아래 논의 과정을 거쳐 총 10편의 영화를 선정했다.
필리핀의 첫 영화 경험은 스페인 사업가들을 통해 이루어졌고 미국영화의 영향 아래 꽃을 피웠다. 필리핀 최초의 영화 상영은 1897년 1월 마닐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아시아 최초로 영화 상영이 있었던 인도 뭄바이 이후 두 번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스페인에 대항한 필리핀 토착민들의 무장봉기가 한창이던 19세기 후반. 스페인을 몰아낸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화하면서 함께 유입된 할리우드영화가 필리핀 전역에 번성하기 시작한다. 맹아적 형태로 자리를 잡아가던 필리핀 영화산업은 1917년 최초의 영화사가 문을 열고 이후 첫 장편영화 네포무세노의 <시골 소녀>(Country Maiden)가 1919년 개봉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필리핀으로 진출한 일본은 식민화 도구로 영화를 활용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지배적인 할리우드영화와 일본이 제작한 ‘계몽영화’들이 경쟁하면서 영화산업은 성장하기 시작했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할리우드영화의 지배력은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 소개되는 영화들은 스페인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휩쓸고 지나가던 시기, 즉 전쟁, 혁명 그리고 계엄령 시기를 거치는 혼란의 역사를 영화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연대기적으로 보자면, 우선 에디 로메로 감독의 <그때 우리는>은 스페인에 맞선 무장봉기와 미국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꿈을 좇아 도시로 나간 시골 청년이 혁명의 격랑 속에서 각성하는 과정은 당시 필리핀이 겪던 고난의 과정에 대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마리오 오하라 감독의 <신이 없던 3년>은 일본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필리핀인이면서 일본인인 주인공을 내세운 전쟁영화이지만 전쟁영화의 스펙터클보다는 인물들의 심리에 기반한 드라마로 엮어가며 승자도 패자도 없는, 모두를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 전쟁임을 이야기한다.
1972년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노골적인 억압과 통치로부터 영화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국의 경험과 유사하게, 정치적 검열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는 퇴폐적이거나 상업적인 영화들이 등장했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빛나는 걸작들이 탄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필리핀에서도 펼쳐졌다. 이 시기에 등장한 주요 감독들이 바로 리노 브로카, 이스마엘 베르날, 마이크 데 레온 등이다. 당시 70년대의 절망적인 사회분위기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로 치토 S. 로뇨 감독의 <70년대>가 있다. 마르코스가 정적들을 잔혹하게 다루던 방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를 통해 당시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리노 브로카와 이스마엘 베르날 감독 세대와 브리얀테 멘도사와 라브 디아즈 세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치토 S. 로뇨 감독과 마이크 데 레온 감독이 나란히 올해 신작을 공개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랄> <대장장이 플라비오> 등 주목
최근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한 필리핀 사회의 양분된 반응은 필리핀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과정이다. 마르코스 독재를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이 극심하게 대립해온 필리핀의 역사가 지금 다시 반복되는 듯한 느낌인데, 리노 브로카 감독의 <카인과 아벨>은 이러한 분열적인 사회 모습을 영화를 통해 담아내고 있다. 재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던 형제가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진영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가족간의 불화를 드러내는데, 형제의 대립은 필리핀 사회가 처한 대립과 분열의 모습에 대한 상징으로 쉽게 읽힌다. 마리우 디아즈 아바야의 <모랄>은 국내에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는 필리핀 최고의 페미니스트 영화다. 10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권력에서 배제되고 주변화된 필리핀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이외에도 마이크 데 레온 감독의 <3세계 영웅>과 필리핀 판타지영화의 걸작인 페르난도 포 주니어 감독의 <대장장이 플라비오> 등도 이번 기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필리핀 영화사를 10편의 영화로 개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필리핀 역사의 흐름과 변화에 영화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둘 사이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확인하는 건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만약 필리핀영화에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과 성취가 있다면, 그것은 필리핀이 거쳐온 성장과 투쟁의 역사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스페인과 미국과 일본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문화들이 영향을 주고받고 어울리며 형성된 필리핀의 정체성이 복잡하고 다양한 색깔을 만들어내는 필리핀영화의 자양분임을 이번 특별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