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성 영화인들⑤] 황혜미 감독 - 새로운 영상미와 결합한 문제의식
2018-10-03
글 : 이길성 (영화사 연구자)
황혜미 1936~
<첫경험> 현장에서의 황혜미 감독(오른쪽).

황혜미는 1970년대에 유일하게 활동한 여성감독이었다. 그녀의 명성을 뒷받침한 것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소르본에서 영화를 전공했다는, 거의 정설처럼 회자됐던 소문이었다. 간혹 남편과 함께 미국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했다는 낭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후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에서 프랑스에 잠시 가 있었을 뿐 소르본을 졸업하지도 않았고 조지타운대학에 다니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활동 당시에 그녀는 내내 여류감독과 소르본을 졸업한 재원이라는 수식어로 규정됐다.

황혜미는 1936년 만주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63년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황종률이며, 아마도 부친이 일본 규슈제국대학 졸업 후 만주국에서 관리로 재직하고 있을 때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이화여고를 거쳐 1959년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고, 1961년 미국에서 김동수와 결혼했다. 졸업 후 프랑스에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바로 미국으로 가느라고 등록만 해놓고 수업을 거의 불참했고 대신 하루에 3편을 볼 정도로 열성적으로 영화관에 다녔다. 이 시기 기억나는 영화로 <무도회의 수첩>(1937)이나 <망향>(1937)을 몰래 보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때부터 유럽영화에 깊이 심취해 있었으며 프랑스 유학 시절에는 유럽 모더니즘영화, 특히 프랑스 누벨바그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출자이자 기획자로서의 성공

미국에서 돌아와 김승옥의 소설을 읽고 매료됐던 황혜미는 남편 김동수의 도움으로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영화화하게 됐다. 상업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방가르드’한 기획을 밀어붙여 제작했지만, 이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했고 젊은 여성 기획자로서 황혜미의 이름을 각인시킨 작품이 됐다. 그러나 문예영화 <안개>의 성공으로 획득한 2편의 외화수입권은 영화계의 초짜였던 황혜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차기작으로 <감자>(1968)를 선택했고, 김승옥에게 감독을 맡겼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검열에 시달렸던 <감자>는 원래 기획의도와 멀어지면서 흥행에도 실패했다. 이러한 힘든 경험을 겪은 후 김동수와 황혜미 부부는 1970년 마벨코리아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첫 작품으로 황혜미 감독·각본의 <첫경험>(1970)을 제작하기로 했다. 같은 해 말 영화사는 보한산업주식회사로 명칭을 변경했고 <첫경험>은 1970년 11월 27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했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영화예술>에서 선정한 1970년 베스트영화 4위에 올랐다.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황혜미는 신인감독상을 받았고 흥행 역시 무난히 성공했다.

황혜미에게 이러한 성공을 안겨준 영화 <첫경험>은 중년을 바라보는 부부 기준(남궁원)과 지숙(김지미)의 권태로운 일상을 다룬다. 부산으로 출장 가는 비행기에서 기준은 대학 자퇴생 인애(윤정희)와 만나고 밀회를 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이를 눈치챈 지숙은 방황하게 되고 탈선을 시도한다. 당시 유행하던 불륜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이야기 자체만 본다면 평범할 수 있으나 권태로운 부부의 일상 그리고 탈선과 좌절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였다.

이후로 황혜미는 <슬픈 꽃잎이 질 때>(1971)와 <관계>(1972)를 연이어 제작, 각본, 감독한다. 황혜미가 사업차 3개월의 외유 끝에 돌아와서 집필한 작품인 <슬픈 꽃잎이 질 때>는 고아인 서은희(문희)가 수녀님의 소개로 부호인 엄상훈(남궁원)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한다. 상훈은 이름난 바람둥이 홀아비이고 방치 속에 자라는 두 자녀는 개구쟁이들이다. 은희는 지속적으로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결국 아이들과 친해진다. 결국 상훈과 은희는 결혼하여 신혼여행을 가지만 돌아오는 길에 사고로 은희는 죽게 된다. 영화는 혹평을 받았고 흥행도 크게 실패했다.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작품성보다는 상업성에 치중한 기획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세 번째 작품인 <관계>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 <졸업>(1967)을 패러디한 것인데 원래의 설정에서 남녀를 변경한 영화이다. 홀어머니(김신재)와 살고 있는 인애(박지영)는 근무하는 회사의 전무 기택(남궁원)의 유혹에 관계를 맺게 된 뒤 직장을 그만두고, 이를 알게 된 어머니는 충격으로 숨진다. 여행사에 취직한 인애는 손님인 준호(신영일)의 적극적 구애로 그와 사귀게 되고 준호의 부모와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준호의 아버지가 기택임을 알게 되고 결혼을 피하게 된다. 힘들어하는 준호에게 기택은 모든 것을 고백한다.

황혜미가 감독한 이 세 영화 모두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그녀의 작품은 감각적인 영상미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이 부재는 안타깝다. 이 한계는 황혜미의 문제의식과 그 영화들이 가지는 당대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인터뷰와 당대의 평가 및 관련 자료를 통해 조망해볼 때 우리는 당시 남성감독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감성 혹은 윤리적 길항을 읽어낼 수 있다. 황혜미의 <첫경험>은 당시 유행하는 불륜이라는 소재를 차용하지만 불륜으로 인한 신파적 희생은 부재하다. 더구나 불륜 자체는 등장인물들에게 기성 사회가 가지는 틀에 박힌 질서나 윤리의식을 벗어나는 상황으로 변주된다. 이처럼 불륜이 무겁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것은 성에 대한 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은 별다른 윤리적 고민 없이 자연스럽게 섹스를 한다. 그들이 느끼는 탈선의 근거는 징후적으로 소품이나 이미지를 통해 보여지거나 간결한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설명이 결여된 채 이미지의 단상을 통해 관객은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권태를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론가들이 호평했던 영화의 도입부인 기준과 지숙의 섹스 장면은 “차가운 금속성의 탁상시계 소리를 에펙트로 넣고 그 속에서 부부의 냉각된 섹스”를 보여줌으로써 “부부의 성 자체가 이미 단순한 생활 속의 반복으로 리듬같은 일상으로 변했음”을 드러낸다(이서림, “참신한 영화감각의 가작”, <영화예술>, 1971년 1월호, 72쪽).

당시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영화들에서 섹스와 불륜은 엄중한 도덕적 문제였다. 성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결혼을 전제로 하는 약속된 행위여야만 했고, 남성의 기만에 속아서 순결을 지키지 못한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첫경험>에서 섹스는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둘의 밀회는 계속되고 이를 눈치챈 지숙은 배신감에 탈선을 시도한다. 기준은 아들과 아내가 있는 가정이 점차 무너지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다. 인애 역시 유부남이라는 현실과 마주했을 때 그 무게감이 점점 힘들어진다. 지숙의 탈선 시도는 아슬아슬하게 멈추게 되고 인애는 담담하게 기준을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게 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일상은 봉합된다. 게다가 ‘첫경험’을 한 인애가 파멸한다는 암시도 없다.

한국 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

<첫경험>의 불륜를 보는 여성적 시선이나 <관계>가 드러내는 한 여성을 둘러싼 부자관계의 비윤리성은 한국 사회의 기본 윤리에 대한 저항적 도전이었다. 그러나 황혜미는 결국 가정으로 돌아가게 하거나 친아들이 아니었다는 안도할 만한 결론을 내면서 그 저항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었다. 이 무뎌지는 저항의 감각이 그녀 본래의 윤리의식의 한계인지 상업성의 압박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상업적 압박이 아니었다면 황혜미는 더 강하게 도전적인 시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안개>를 제작하는 도중이었던 1967년 9월, 그녀는 당시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실험적인 시도는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밑지는 일이 싫어 월리엄 와일러 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이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아니러니하게도 <안개>는 황혜미가 관여한 영화 중 가장 예술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이 됐을 뿐 아니라 흥행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첫경험>과 이후 작품을 통해 작가적 의식과 상업성은 점차 균형을 잃어갔다. ‘월리엄 와일러’ 같은 분위기의 상업영화들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와 그녀가 가진 성과 결혼에 대한 시대감각, 그리고 1970년대라는 현실상황은 매끄럽게 조화되지 못했다. 황혜미는 세편을 끝으로 영화활동을 접었으며 몸담고 있던 보한산업주식회사 역시 1973년 이후에는 제작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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