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7년 4월 8일,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이 세상을 떠났다. 올해 4월 16일에는 1950~60년대를 풍미한 톱스타이자 한국영화사에 등장한 세 번째 여성감독 최은희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여성감독의 존재감이 전무하다시피했던 20세기 중반, 충무로라는 광야에서 그들만의 설 자리를 개척했던 두 감독의 잇단 부고를 접하면서, 한국영화 속 여성감독들의 활약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후대의 여성감독들에게 선구자적인 존재로 평가 받는 6명의 여성감독을 조명한 한국영화박물관의 전시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홍은원·최은희·황혜미·이미례·임순례>(9월 28일~12월 5일, 공동주최 <씨네21>)의 개막을 맞아 이들의 활약상을 기록한 다양한 필자들의 글과 이후에 등장한 여성영화감독들을 아울러 여성감독 30인의 계보를 정리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카메라를 든 손을 멈추지 않아 온 감독들의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영화계가 귀기울여야 할 소중한 목소리들이다.
“연초에 촬영을 하려 했더니, 여자영화부터 찍으면 재수 없다고 다들 참여를 안 했다.” 임순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 여성 영화인이 말하는 영화>(2001, 이하 <아름다운 생존>)는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첫 작품이자 마지막 영화 <미망인>(1955)을 완성할 당시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레디 고’를 외쳤던 그는 영화 현장에서 여성이기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편견의 경험을 털어놓는다. 영화는 뒤이어 박남옥 감독 이후에 등장한 다양한 여성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그들은 영화 현장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잦은 술자리를 견뎌내야 했던 일화(이미례)부터 기술적인 분야에서 배제되었던 경험(변영주), 남성적인 면모를 어필해야 했던 상황(이정향), 커리어와 결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딜레마(김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영화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성 영화인들의 생존법을 조명한 다큐 <아름다운 생존>으로부터 17년이 지난 지금, 여성 영화인들이 처한 상황이 더 나아졌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영화과 학생의 남녀 성비가 동등한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메인 스트림에 진출하는 여성감독들의 숫자는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사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그리 긍정적일 수만은 없음을 방증한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도 영화를 만든 감독들
9월 28일부터 12월 5일까지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홍은원·최은희·황혜미·이미례·임순례>(이하 전시 <아름다운 생존>)는 한국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구자로서의 여성감독들을 조명하는 전시다.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알려진 박남옥 감독부터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이미례, 임순례 감독까지, 전시를 찾은 관객은 여성감독 6인의 작품과 그들의 삶에 대한 시청각 자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임순례, 변영주, 정재은, 이정향, 박찬옥 감독 등 1990년대 일련의 여성감독들이 연달아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영화계에서 자신의 영화를 연출한 여성감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전시 <아름다운 생존>을 준비한 한국영상자료원 관계자들이 “리스트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선택할 수 있는 후보군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과거의 충무로에서 여성감독이란 이례적인 존재였다. 영화 현장의 이단아와도 같았던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에 대해서는 다큐 <아름다운 생존>의 몇몇 일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무려 17년 만에 여성감독의 계보를 이은 이미례 감독은 유일한 여성 연출자라는 이유로 현장에 퍼졌던, 자신에 대한 해괴망측한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변영주 감독은 영화인 촬영 교육 시간에 남자감독이 아닌 여자감독이 카메라를 들자 발생했던 부당한 차별의 일화를 고백하고 있다. 영화 현장의 소수자로서 끊임없이 그 자질과 능력을 의심받아왔던 여성감독들은 남성감독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환경에 내몰렸고, 매 순간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지 스스로 자문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몇몇 여성감독들은 기어이 살아남았으며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했다. 전시 <아름다운 생존>은 영화감독을 꿈꾸는 후대의 여성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여성감독 6인의 업적을 자세하게 소개할 예정이다.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은 한국전쟁의 폐허 가운데 <미망인>을 촬영하며 연출부터 기획, 녹음, 편집 등 영화 프로덕션의 전반을 관장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작가’(신경균 감독의 <유정무정>(1959))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홍은원 감독은 여성 판사의 자살을 다룬 <여판사>(1962), 사회 통념에 저항하는 여인을 조명하는 <오해가 남긴 것>(1966) 등의 작품을 통해 그간의 한국영화가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여성의 다양한 삶을 그려냈다. 감독이기 전에 이미 은막의 스타였던 최은희 감독은 파트너 신상옥 감독과 신필름의 그늘에 머물지 않고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등 자신의 색깔이 묻어난 작품들을 연출했다. 이 밖에 유럽영화의 영향으로 지적이고 실험적인 영상을 연출했던 황혜미 감독과 상업적인 감각을 갖췄던 이미례 감독, <세 친구>(1966)부터 <리틀 포레스트>(2018)에 이르기까지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을 선보인 임순례 감독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여성감독의 경계를 확장하는데 기여한 영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시 <아름다운 생존>은 한국영상자료원 내 위치한 한국영화박물관의 기획전시실 및 소극장에서 열린다. 기획전시실은 여성감독 6인의 연대기를 기록한 연표가 전시장 벽을 채우는 가운데 개인 사진, 영상물과 시나리오 등 여성감독들 각자의 스토리를 담은 6인의 공간, 여성감독 6인과 여성 영화인들의 교류를 조명한 사진과 자료들을 선보이는 ‘여성 영화인 공간’으로 꾸려질 예정이다. 박물관 내 소극장에서는 전시 기간 동안 매일 두편의 영화가 반복 상영된다. 영화 현장 곳곳에서 활동해온 다양한 여성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기록한 임순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과 박남옥 감독의 데뷔작이자 유일한 연출작 <미망인>이다. 전시를 기획한 한국영상자료원의 오성지 차장은 “이번에 주축이 되는 여성감독 6인에 대한 10분가량의 오마주 영상을 현재 김일란 감독이 만들고 있다”며 10월 28일 이후 박물관 내 소극장에서 이 작품 역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전했다.
영화계의 성평등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나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다. 우리나라 여성 영화인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고 세계로 진출하는 것도 보고 싶다.”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박남옥 감독이 남긴 말이다. 지금의 한국영화계에서는 예전보다 더 많은 수의, 하지만 여전히 충분하지는 않은 수의 여성감독이 그들 각자의 궤적을 그려가고 있다(이어지는 지면 참조). 한해 동안 한국 극장가에서 관객을 만나는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남성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압도적으로 점유율이 낮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영화계의 성 평등을 이루기까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다. “나는 태생적인 성 자체를 바꿀 수가 없고, 영화를 만드는 걸 그만두지 못한다.” 여성감독으로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말처럼, 여성감독들은 카메라를 드는 걸 멈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여성감독’이라는 수식어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우리는 그들의 삶과 작품을 꾸준히 기록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여성감독들의 ‘아름다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