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흥행이었다. 올해 초 개봉한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가 150만명의 스코어로 극장가 비수기에 선전을 했다. 소소한 드라마, 적은 예산, 여성배우인 김태리의 첫 주연 등 시장에서 약세라 평가하는 위험요소가 다분했던 작품이다. <리틀 포레스트>의 흥행은 그럼으로써 남성 캐릭터의 등장과 자극적인 설정, 높은 예산의 영화만 흥행할 수 있다는 투자자들의 인식을 불식시킬 수 있는 선례를 제시했다. 무엇보다도 1996년 장편 <세 친구>로 데뷔, 올해 22년째인 임순례 감독의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숲세권, 슬로푸드, 소확행 등의 가치 언어가 통용되는 사회. 혜원(김태리)의 시골 생활은 경쟁 사회에서 벗어나 삶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지금 대한민국 젊은 층의 사고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그렇게 2018년의 ‘트렌드’를 담아낸 영화 같지만, 이 이야기가 힘을 받은 데는 임순례 감독이 지난 영화들을 통해 보여준 영화 철학, 영화의 지향점이 탄탄한 바탕이 되었다.
데뷔까지의 굴곡과 장편 데뷔작 <세 친구>
<리틀 포레스트>로 또 한번 임순례 감독의 건재함을 입증한 현재,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임순례 감독의 지난 시간들을 살펴봄으로써 그 저력을 확인하고자 한다. 임순례 감독의 역사를 돌아보는 건 ‘한국에서 그 시절, 여성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고도 중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차기작을 내놓고 호평 받는가’에 대한 답변과도 같을 것이다. 임순례 감독이 처음 영화계에 뜻을 품고 입문하기까지 90년대 초반 상황으로 볼 때 감독 데뷔까지에는 쉽지 않은 굴곡이 있었다. 감독들의 데뷔까지의 과정을 기술한 <데뷔의 순간>(주성철 지음)에서 보면 “여자라서” 영화감독이 되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는 시선에, 처음엔 꿈을 접고 영문학과를 택하기도 했으며, 감독을 꿈꾸는 여자들 대부분이 스크립터 역할이 주어지던 때라, 오히려 그 인식을 피하려고 부러 연출부의 다른 포지션을 꿈꾸기도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온 그는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1994)의 연출부에서 스크립터로 일한다. 그 시기에 임순례 감독이 스스로 만든 영화가 독립단편영화로 엄청난 호평을 이끌어낸 <우중산책>(1994)이었다. 변두리 삼류 극장에서 근무하는 매표직원 여성의 이야기를 응시한 작품으로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과 젊은비평가상을 수상했으며, 영화계가 임순례 감독을 주목하는 계기가 된다. 마침 당시는 삼성영상사업단을 통해 대기업 자본이 충무로에 유입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전까지 일반적이던 충무로 도제 시스템을 통해 입봉을 하려 했다면 장벽이 될 요소들이 없지 않았지만, 영화제 수상으로 입증한 재능을 인정받으며, 임순례 감독의 장편 데뷔는 다소 빨리 찾아왔다. 그렇게 2년 후 <세 친구>가 첫 장편 연출작이 되었다.
<세 친구>와 이후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까지, 단편 <우중산책>과 더불어 임순례 감독의 초기작으로 불리는 세 작품은 다 다르지만, 무력한 청춘의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선상에서 바라보게 되는 영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세 친구가 갑작스레 날아온 입영 통지서를 받고, 군 면제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가 청년들에게 가하는 압박과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으로 호평받았으며, <세 친구>에서 묘사된 씁쓸한 청춘의 삶은 차기작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이어진다. 나이트 클럽에서 연주하는 남성 4인조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리더 성우(이얼)가 떠났던 고향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을 다시 찾아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꿈꾸던 밴드 일을 하고 있지만 생활에 치여 허우적대는 30대 밴드 마스터와 그가 바라보는 친구들의 현재가 씁쓸하게 묘사된다. 마치 <세 친구>의 막막한 청춘의 20년 후를 들여다보는 게 아닐까 싶은 드라마 장치를 통해 임순례 감독은 개개인을 압박하는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화두를 또 한번 던지고 있다.
잇단 비평적인 호평에도 불구하고 임순례 감독의 시장에서의 입지는 미약했다. 호평과 반대로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던 임순례 감독은 장편 차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가 2000년대 초반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류승완 등의 감독이 대거 출연하면서 한국의 장르영화가 ‘뉴웨이브’라는 말로 지칭되며 활황을 맞기 시작할 때 정작 여성감독들의 입지와 여성이 주체가 되는 영화들은 자취를 감추었던 시절이다. 그사이 임순례 감독은 인권영화 옴니버스 프로젝트 <여섯개의 시선>(2003) 중 한편인 <그녀의 무게>를 연출했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한 여성의 극단적 선택을 그린 작품으로, 단편 <우중산책>에서부터 이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7, 이하 <우생순>), <날아라 펭귄>(2009) 등에서 임순례 감독이 표방한 여성 서사의 맥을 잇는 작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편 연출의 기회는 쉽게 찾질 못했던 휴지기이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임순례 감독의 ‘부활’을 알리는 기회가 찾아온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활약한 여자 핸드볼 선수단의 활약을 그린 <우생순>은 임순례 감독 자신이 가진 주제가 대중과의 접점을 획득한 첫 순간이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함께한 명필름과 다시 작업한 작품으로, 전작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걸린 6년 만의 신작이었다. <우생순>은 모든 면에서 기록적인 작품이었다. 전작의 흥행을 입증하지 못한 감독이 시장의 기대를 얻지 못한 채 손을 댄 작품이자, 흥행 취약 장르인 스포츠영화라는 우려도 가지고 있었다. 또 여성이 전면에 나선 여성 주연 영화라는 점도 우려의 지점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손익분기점을 맞추겠다”는 감독 자신의 의도에서 시작해, 4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이룬 성공은 당시 충무로 여성감독의 명맥을 환기하는 기록할 만한 성과이기도 했다.
이후 임순례 감독은 기존의 약자를 돌아보던 시선을 확장해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짚는 데 관심을 기울여왔다. 사교육 열풍, 기러기 아빠 문제와 식성과 취향 등에 인색한 우리 사회의 풍경을 모자이크한 <날아라 펭귄>(2008)을 거쳐, 시골로 내려간 아나키스트 최해갑 가족의 충돌을 통해 자본주의, 환경 파괴, 국가, 교육의 문제를 되새김질하는 <남쪽으로 튀어>(2012), 2005년 있었던 황우석 사건을 모티브로 줄기세포 조작사건을 다룬 <제보자>(2014) 등에서 보여준 일련의 흐름은 임순례 감독의 색깔로 다가왔다. 또한 그사이 상업영화의 사이즈에 머물지 않고 작은 영화의 기획과 연출로도 활동을 이어왔다. 우시장에 몰래 소를 팔러 갔다가 소와 여행을 하며, 자아를 찾는 한 남자의 내적 성장을 그린 작품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2010)을 연출하며 자신의 삶의 철학을 견지해왔으며, 연출가의 역할을 하는 그 시기, 동물보호를 위한 옴니버스영화 <미안해, 고마워>(2011)의 제작 총지휘와 연출을 하는 등의 활동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영화로 실천하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모순을 짚어내다
최근 임순례 감독을 만난 건 영화계 성폭력 예방, 피해자 지원을 모색하는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의 센터장으로서였다. 지난 3월 열린 개소식에서 임순례 감독은 “미세먼지가 많다고 활동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지 않냐”며 미투(#MeToo) 운동은 “권력을 가진 남자의 횡포와 이에 공적으로 보호할 장치를 갖추지 못한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이자 어둠이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각종 편견에 찬 시선으로 위축됐던 미투 운동에 대한 지지를 전달하며, 미투 운동의 선봉에 나서고 있다.
임순례 감독이 개진해온 필모그래피 자체에 충무로가 가진 구조적 문제와 해결 방법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순례 감독은 그런 면에서 배급과 투자가 규모가 큰 영화로만 몰리”는 상황에서 여성감독의 약세를 몸소 겪고 지켜보면서, 영화계 수직계열화의 흐름에서도 설 자리를 잃지 않고 지금의 성과를 거둔 대한민국 대표 감독이다. 지난 22년 동안 그가 내놓은 작품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소통하고자 하는 캐릭터가 이 사회의 힘없는 청년, 여성, 소외된 자, 그리고 보호받아야 할 동물들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그렇기에 그 소통의 창구를 지속적으로 열어준 임순례 감독의 자리가 지금의 극장가에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