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들⑥] <벌새> 김보라 감독 -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
2018-10-24
글 : 송경원
사진 : 박종덕 (객원기자)

올해 부산영화제 화제작 중 한편인 <벌새>는 느린 걸음으로 관객을 뒤흔든다. 김보라 감독은 소재를 자극적으로 풀어내는 여느 학원 성장담과 달리 인물과 거리를 둔 채 차곡차곡 일상의 공기를 쌓아나간다. 덕분에 이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묘사될수록 모두의 경험담으로 확장된다. 무너진 성수대교의 상처가 1994년에 머물지 않고 어제의 일처럼 되살아나고, 일상을 버텨내는 소녀의 흔들림이 그 사소함으로 모두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는 기적. <벌새>를 통해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중인 김보라 감독에게 그 지난했던 시간에 대해 물었다.

-부산에서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넷팩상(NETPAC Award) 수상도 축하한다.

=100만번은 봤는데 영화를 막상 스크린에서 보니 눈물이 쏟아졌다. 김새벽, 박지후 배우 모두 울고 있더라. 상영하기 전부터 몸이 아플 정도로 걱정이 됐다. 관객의 분위기가 너무 따뜻해서 위로받고 나온 기분이다. 1993년생 남자 관객이 무척 공감됐다고 말해준 게 특히 기억이 난다. 자기는 그 시대를 살지 않았는데도 소소한 사연들이 공감가고 은희의 상처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기억나는 것 같다는 말이 고마웠다. 개인적이고 내밀한 체험을 넘어 동시대적, 보편적인 이야기로 다가가길 바랐는데 미흡하나마 교감을 이룬 것 같아 뿌듯하다.

-단편 <리코더 시험>(2011)을 기반으로 했는데 완성까지 무려 7년이 걸렸다.

=워낙 내밀한 이야기들을 다루다 보니 시나리오 때부터 용감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땐 몰랐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려니 그 말이 실감이 되었다. 나름 책임감이 강한 편인데 애초에 세워둔 제작 마감을 반복해서 넘겼다. 지금에야 비로소 인정한다면, 두려웠던 것 같다. 너무 사랑해서 두려웠다고 해야 하나. 미필적 고의로 계속 미루다 보니 오래 걸렸다. 심리적인 문제가 가장 컸지만 장면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주변에선 제작을 위해 어느 정도 타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하지만 왠지 여기서 양보하면 뭔가 무너질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결국 총32회차 촬영을 고집했고 그만큼 시작이 늦어졌다.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영상위원회 제작지원은 물론 미국 IFP 내러티브랩, 선댄스영화제 후반작업지원까지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각광을 받았다.

=제작지원이 없었다면 못했을 거다. 단지 제작비 때문만이 아니라 나를 믿어준 분들과의 약속을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자는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거리를 둘 시간이 필요했다. 탈탈 털고 솔직하게 스스로와 대면하는 시간, 방치해뒀던 그 시절의 나에게 화해를 건네는 시간이었다. 유년 시절의 이야기지만 그땐 도리어 냉소적이었던 것 같다. 좀더 자라서 거부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지금은 상처들과 화해해나가는 단계다. 이제 <벌새>는 자전적인 이야기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내 안에서 길어져나온 이야기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한편 이야기를 고민하고 쓰고 화면으로 옮기는 동안 그 시간마저 내 일부가 됐다. 나만의 일기장이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로 교감되었으면 한다.

-벌새라는 제목이 영화의 이미지와 무척 잘 어울린다.

=20대 때 벌새라는 단어를 알았는데 우선 단어 자체가 예쁘다고 느꼈다. (웃음) 조그만 새가 1초에 몇 십번의 날갯짓을 해서 꿀을 찾아간다는 게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끊임없이 희망을 갈구하는 몸짓이 내가 그리던 은희와 닮았다. 특히 ‘사랑받고 싶다’는 추상적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인 만큼 대중적이고 익숙한 기승전결과는 결이 약간 달랐다. 내 단편적인 기억들을 벽돌 삼아 새로운 집을 짓는 과정이 필요했다. 감정적인 스펙트럼을 만들어나가는 게 이 영화의 기승전결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를 하나만 꼽자면 두려움인 것 같다.

=2007년 미국 유학을 가서 가장 많이 꿨던 꿈이 중학교로 돌아가는 꿈이었다. 깨고 나면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다. 그 시절이 내게 상처로 남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조심스럽게 먼저 꺼내본 게 단편 <리코더 시험>이고 집대성한 화답이 <벌새>다. 촬영 끝나고 이틀 있다가 꿈을 꿨는데 중학교 동창회를 가는 꿈이었다. 늘 두렵던 그 친구들이 나를 되게 따뜻하게 환영해줬다. 그때 비로소 내 안에서 하나의 과정이 끝난 기분이 들었다. 명상 용어 중에 ‘영혼의 어두운 밤’이란 표현이 있다. 동이 트기 전에 가장 어둡고 아픈 시기를 말한다. <벌새>를 만드는 시간이 아마도 영혼의 어두운 밤이 아니었나 싶다. 새벽이 터오는 지금 드는 생각은 감사함이다. 나를 도와준 친구들에 대한 감사,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힘을 준 배우들에 대한 감사,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모든 만남에 대한 감사를 배웠다. 아쉬운 점도 많지만 일단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자극적으로 소재를 착취하는 몇몇 성장영화와 달리 일상을 관조적으로 쌓아나가며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놀랍다.

=다큐멘터리처럼 건조하게 찍는다고 일상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단정하지 않고 삶의 복잡다단한 면을 투명하게 담아내는 것이다. 나 역시 은희처럼 영지 선생님 같은 존재를 만났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런 후에야 삶의 길에서 많은 문들이 열린 것 같다. 때로는 아름답고 어떨 땐 참기 힘들 만큼 괴로울 때도 있다. 괴롭다고 도망치지 않고 즐겁다고 안주하지 않는 가운데 오늘이 쌓여간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초기작이 연상된다는 평론가의 평가도 있었다.

=그 한줄을 읽고 그간의 고단함이 녹아내렸다. 그 리뷰는 바로 캡처해서 SNS에 올려뒀다. (웃음) 에드워드 양은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한명일 뿐 아니라 이 영화의 유일한 레퍼런스를 꼽는다면 <하나 그리고 둘>(2000)이었다. 영화가 누군가의 일상에 큰 위로가 된다는 건 혁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본심이 제대로 전달되는 이런 순간 때문에 계속 영화를 만들게 되는 것 같다.

■ 시놉시스_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고 김일성이 사망했으며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1994년. 중학생 은희(박지후)는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소소한 일탈로 해방감을 느끼던 은희는 어느 날 학원에서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를 만나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다. 벌새가 꿀을 찾아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듯 사랑을 갈구하던 소녀와 냉혹하고 폭력적인 세계의 대립을 내밀하면서도 관조적인 시선으로 찬찬히 따라가는 영화

최신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