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단편소설에서 제목을 따온 <영하의 바람>은 주인공 영하의 10대 시절을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성장영화다. 성장을 재촉하는 건 영하(零下)의 바람처럼 매서운 시련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련의 강도보다 그에 대처하는 소녀들의 처세에 집중한다. 버림받지 않으려고 빠르게 적응하고 체념하는 법을 배워버린 소녀들. 그러나 그 바람을 함께 맞아도 좋다고 생각하는 소녀들의 한줌 따뜻한 마음이 영화에 맺혀 있다.
김유리 감독이 소녀의 성장담을 데뷔작으로 만들게 된 건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의 감수성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사회로 나오면서 성장통을 겪었다.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됐고,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는 최초의 부조리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개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의 구분이 모호한 복잡한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돼 문제가 생겨도 “인정상 묵인되고 용인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에서 영하도 일련의 ‘복잡한 사적인 영역’의 일들을 겪는다. 12살의 영하는 이혼을 하고 새 출발을 하려는 부모로부터 잠시 버림받는다. 15살의 영하는 엄마 은숙(신동미)과 새아빠 영진(박종환)과 단란하게 살아가지만,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가 된 단짝 사촌 미진과 이별해야만 한다. 미진을 거둘 여력이 없다며 냉정한 태도를 취하는 엄마가 원망스럽지만 영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수능을 마친 19살의 영하(권한솔)는 어려서부터 다정하게 지낸 새아빠에게 성추행을 당한다. 엄마는 아빠의 실수를 덮자 한다. 이후 세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영하의 곁엔 미진(옥수분)만이 남는다.
<영하의 바람>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일은 생각보다 난감하다. 이야기를 정리하고 나면 19살의 영하가 겪는 사건이 도드라져 보이지만, <영하의 바람>은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삶의 편린을 깊이 응시하는 영화다. 따라서 메인 캐릭터와 서브 캐릭터, 메인 플롯과 서브 플롯이 사이좋게 공존한다. 김유리 감독은 “적어도 이 영화에선 충격적 사건을 따라가는 건 의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가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을 미디어로 접하면서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불행한 사건이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쌓여온 일의 결과라면, 긴 시간을 다루어야 할 것 같았다. 12살부터 19살까지 영하의 이야기를 세 시기로 나눠 보여주는 서사 구조도, 왜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 결과다.”
삶의 조각조각을 기운 서사에서 두드러지는 건 입체적 캐릭터들이다. 영화엔 칭찬받아 마땅한 100%의 착한 사람도 없고, 구제의 여지가 없는 100%의 나쁜 사람도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의 행동은 대개 ‘어떻게 그럴 수 있지’와 ‘그래 그럴 수 있지’ 사이에 놓인다. 특히 엄마 은숙과 아빠 영진 캐릭터가 그렇다. “은숙과 영진은 쉽게 판단내리기 힘든 인물이었으면 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잘못 됐어’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모호함이 있길 바랐다.” 가령 이런 식이다. 은숙은 곰국을 끓여, 먹기 좋게 포장까지 해서 아픈 할머니와 함께 사는 미진의 손에 들려 보낸다. 살찐 미진을 향해 ‘네가 살찐 건 네가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야’라는 한마디를 덧붙여서. 또한 은숙은 목사 안수를 받으려고 노력하면서도 교회 신도들에게 몰래 약을 팔아 돈을 챙긴다. 은숙의 자기모순적 행동이 반복될수록 경제적 활동을 포함해 그 어떤 일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영진의 수동성이 강조되는데, 상반된 캐릭터들이 충돌하고 화합하는 대목들이 재밌다. “캐릭터의 모호함을 즐긴 박종환 배우가 그랬다. ‘도대체 영진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런 말을 했다. ‘영진이 뭐하는 사람인지 정말 모르겠네요.’ (웃음)” 쉽게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 힘든 인물들을 옹호하거나 지탄하거나 동정하는 건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10대의 성장영화를 만드는 김유리 감독에겐 “아이들의 시선”이 중요했다. “내가 판단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에 집중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가령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2004)를 보면, 아이들은 엄마한테 버림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를 그리워하고 좋아한다. 객관적인 어른의 눈엔 아이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가 나쁜 사람인데도, 아이들에겐 그렇지가 않다. 그처럼 나의 판단이 아니라 아이들의 입장이 되어 상황을 바라보는 게 중요했다.” 영화의 제목도 <영하의 바람>이고, 분량상으로도 ‘영하의 성장담’이 맞지만, 김유리 감독은 소녀들과 아이들이라는 복수의 표현을 통해 영하의 곁에서 함께하는 미진의 역할을 강조했다. 김유리 감독은 이 영화가 “영하와 미진의 성장담으로 읽히길 바란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영하의 바람’이 몰아치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견디게 하는 건 내 곁에 있어줄 한 사람의 존재인 것 같다. 영하에겐 미진이 바로 그런 존재다.”
어쩌면 김유리 감독에겐 영화가 그런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10대 때부터 키운 영화에 대한 애정은 대학 연극영화학과 진학으로 이어졌다. 졸업 후 <부산>(2009),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2011), <은교>(2012) 등에 스크립터, 연출부로 참여하며 현장 경험도 두루 쌓았다. 단편 <저 문은 언제부터 열려 있었던 거지?>(2013)로 제1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단편 대상을 받은 뒤, 4년을 준비해 첫 장편 <영하의 바람>을 완성한 김유리 감독은 앞으로도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한 세상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다. 그 꿋꿋한 다짐에 대한 화답인 듯, <영하의 바람>에 부산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이 돌아갔다.
■ 시놉시스_ 이혼한 엄마에게 새사람이 생겨 12살의 영하는 아빠의 집으로 보내진다. 그러나 이사 당일 아빠와 연락이 두절되고, 영하의 짐을 실은 이삿짐 트럭은 엄마의 집으로 되돌아온다. 15살의 영하(권한솔)는 엄마 은숙(신동미)과 새아빠 영진(박종환)과 한집에서 살아간다. 목사가 되고자 하는 엄마는 교회에 나가랴, 공부하랴, 가장 노릇하랴 바쁘다. 새아빠는 경제적으로는 무능하지만 딸과 아내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한편 영하의 사촌 미진(옥수운)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의 죽음으로 다른 친척집으로 보내진다. 그리고 19살이 된 영하.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진 새아빠에게 성추행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