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배우 문소리, "문소리의 리듬"
2018-11-15
글 : 이화정
사진 : 백종헌

형수님, 하고 부르는 후배 윤영(박해일)에게 “형수 아닌데. 이혼했어요” 하고 대뜸 밝히고, 그 후배와 즉흥적으로 군산 여행길에 오른 여자. “미친 거 같아. 갑자기 오라는 사람도 그렇고 따라온 나도 그렇고”라고 말하지만 실은 불혹의 나이를 지난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윤영을 따라왔을까. 바람나 이혼한 전남편(윤제문)에게 “개새끼”라고 혼쭐내주고,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고 지금도 갈팡질팡하는 후배 윤영을 다그치며, 마음에 드는 민박집 주인 이사장(정진영)에겐 “저한테 궁금한 거 없으세요?” 하며 먼저 호감을 표하는 여자. 점쟁이에게 “그렇게 많이 알면 점집을 차려라”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신껏 살았던 여자가, 그런데 길을 잃었다. 영화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송현의 군산 여행은 과거에 발목 잡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길을 잃은 그녀의 짧은 버퍼링이다. 기대고, 울기도 하고,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지만 우리는 송현이 앞으로 나아가리라 믿고 응원하게 된다. 문소리라서,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 여자 송현. 장률 감독의 공간에 지금까지 이 정도로 리드믹한 파장을 전해준 배우가 있었을까.

-장률 감독과는 <필름시대사랑>(2015) 이후 두 번째 작업이다.

=<두만강>(2009) 때부터 감독님의 팬이었다. ‘이 사람은 작가다’라는 생각을 그때 했다. 이후 <경주>(2014)로 환골탈태와 같은 변화의 움직임을 감독님 스스로 가져가는 것이 존경스럽더라. 그런 일련의 작업을 응원하고 싶었다. <필름시대사랑>이 단편 <동행>(2015)에서 시작해 장편이 된 경우이고, 촬영분량도 2회차로 짧았다면 이번엔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거다.

-장편을 같이 작업하자는 이야기는 꽤 오래전부터 오간 걸로 알고 있다.

=<필름시대사랑> 촬영 때부터 감독님이 (박)해일이랑 나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며 시나리오를 보내셨다. 송현이라는 이름은 내가 개인적으로 쓰는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몇년 전에 누가 이름을 바꾸면 운이 따른다고 바꾸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는데, 문소리라는 이름을 어떻게 바꾸나. 그런데 집에서는 그 이름을 좀 써왔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할 때도 쓰고. (웃음) 그 이름을 알려줬더니 감독님이 그걸 쓰자 하셨다.

-짧은 군산 여행이 정체된 송현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통과해야 할 일종의 ‘터널’이라면, 그 길에 동행한 파트너와의 호흡이 중요했다. 박해일과는 본격적으로 첫 작업이었는데, 신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익숙해 보인다. 대작과 저예산, 독립영화 등을 오가는 작품의 행보라는 점에서 두 배우가 서로 다르지만 비슷한 기운을 만들어온 것 같다.

=작업을 같이 안 했는데도 이 정도로 친한 사람은 해일이밖에 없다. <박하사탕>(1999) 하기도 전에 해일이가 임순례 감독님과 내가 출연한 연극을 보러 왔고, 그때 뒤풀이에서 알게 돼 친해졌으니, 정말 오래된 인연이다. 또래라 공감대도 있고 사고방식이나 성향도 비슷해 만나면 편하다. 정색하고 작업에 대해 의논하지 않지만, 항상 다음 작품은 뭘 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독 작품 인연이 없었는데 둘 다 이번 작업을 기다렸던 것 같다.

-최근 장률 감독의 작품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큰 극의 리듬을 장악하는 구도를 취한다. <경주>의 신민아, <춘몽>(2016)의 한예리가 그 역할을 했다면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서는 배우 문소리의 리듬을 적극 취한다. 장률 감독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머물러 있고, 여자들은 어떻게서든 앞으로 나아간다”(<씨네21> 1176호 특집 ‘부산에서 만난 영화인들’)고 한 말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워낙 한 호흡으로 가는 스타일이고, 컷으로 리듬을 내는 감독이 아니다보니 이번 작품에서의 경쾌한 호흡이 더 도드라진 것 같다. 물론 감독님이 가진 리듬이 있지만 해일이와 내가 그 안에서 다른 리듬을 불러내려 했다. 그런데 해일이는 장률 감독과 워낙 친해서 딱 붙어 있는 리듬이지 않나. (웃음) 그러니 내가 어떻게든 이번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송현은 남편의 외도가 원인이 되어 막 이혼했고, 아직 심정적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가고 있다. 송현이 윤영과 전남편, 그리고 이사장 사이를 오가며 취하는 태도를 어떻게 해석했나.

=시나리오를 보면서 송현이 불쌍하게 보이면 어떡하지 걱정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휘청휘청하는가 하면, 또 어떤 면에서 보면 흘리고 다니는 여자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감독님도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을 아셨는지 한번은 나를 카페로 부르시더니 티베트 여승이 부르는 노래를 들려주시더라. 종종 들으시는 노래인데, 본인도 이 사람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다고, 내가 그걸 모르지 않는다고 말씀해주시더라. 그 음악을 나보다 송현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도 같은 마음이구나 싶었다.

-구체적인 코멘트와는 다른, 장률 감독만의 우회적인 연기 연출론인 것 같다.

=한번은 군산에서 촬영을 하는데 배우들을 불러모으더니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좋아하는 시를 들려주셨다. 그때 들려준 시가 네덜란드 작가의 시였는데 한국에는 번역본이 없어 중국말로 번역된 걸 한번 읽으시고, 그걸 다시 한국어로 이야기해주셨다. 너무 쓸쓸하고 스산했는데,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영화 속 인물들이 군산에서 마지막 보여준 모습들이 그 시간을 통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전작에서 함께한 감독들과 차이도 있을 텐데, 각각 어떻게 캐릭터의 행동을 도출해나갔는지 궁금하다.

=내가 송현이 되는 것,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100% 그 인물이 되겠나. 시나리오만으로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럴 때는 그걸 파악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한다. 장률 감독님의 작업은 그런걸 계속 알려고 노력해야 하는 작업이다. 내가 극속의 인물과 만나서 변화를 일으킨다고 생각하는데,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놓여 있느냐다. 전체 영화의 톤 앤드 매너에 인물을 대입해야 그 반응이 나온다. 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핵심과 닿아가는 그런 게 자연스럽게 생긴다. <아가씨>(2016)에서 이모를 연기할 때 촬영 중간에 들어가 4회차를 찍고 빠져야 해서 걱정이 컸다. 박찬욱 감독님이 시나리오 쓸 때 들은 음악을 촬영하기 한참 전에 주셨는데 그런 것들이 스며들어 내 캐릭터의 리듬이 되더라. 홍상수 감독님은 그전부터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 그의 톤 앤드 매너에 익숙하다. 그게 그대로 촬영으로 이어져 내 몸이 받아들이고 반응하게 된다.

-베이징(<당시>(2004)), 몽골(<경계>(2007)), 충칭(<중경>(2007))에 이어 한국의 이리(<이리>(2008)), 두만강(<두만강>), 경주(<경주>), 수색(<춘몽>)에 이르기까지 장률 감독의 영화 속 장소는 인물이 그 안에서 유기적으로 영향을 받는 또 하나의 캐릭터로 역할한다. 서울의 송현이 군산으로 가 변화를 모색하듯, 배우가 군산이라는 공간에 들어가 느낀 정서는 무엇이었나.

=서울에서 2주, 군산에서 2주간 촬영했다. 군산의 이사장의 민박집을 가보니 신기했다. 사실 그냥 갔다면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이렇게 좁은 곳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감독님이 움직이면서 공간이 다르게 느껴지더라. 동국사도 그랬고, 중국집도 그랬다. 가는 곳마다 감독님의 눈으로 다시 보면, 그 공간이 달라지더라. 같은 곳이지만 결국 영화 속 장소는 작가가 창조해낸 공간이다. 그 사람만의 눈으로.

-그 감정이 캐릭터의 움직임에 반영된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문숙 선배가 나오는 군산의 칼국숫집 명궁에서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됐다. 이후 송현에게 올 변화의 전조 같았다. 그 느낌이 캐릭터의 파장을 올려주었다. 터널 장면이 두번 나오는데 그 장면을 찍으면서, 이 영화가 어떻게 끝이 날까 내가 궁금하더라. 터널을 지나서 내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진입하게 될 것 같더라. 군산을 떠난 후 송현의 미래가 어떻게 될까. 캘리포니아처럼 사시사철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는 화사한 인생은 아닐 것이다. 태풍도 오고 한파도 들이닥칠 것이다. 그래도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자기 인생을 자신의 의지를 갖고 끌어나가려고 하지 않을까. 상처도 있고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심지가 있어서 방향성을 가지고, 큰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그런 삶을 살지 않을까.

-직접 연출한 <여배우는 오늘도>(2017)의 ‘여배우’는 창조된 캐릭터지만, 분명 배우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문소리가 투영되어 있었다. 또래 여성인 송현의 선택 역시 또 다른 의미로 문소리가 반영된 지점이 엿보인다.

=연기를 하면서 늘 그 부분을 고민한다. 송현이라는 인물은 감독이 만든 인물이자 개별적인 자기만의 특성을 가진 인물이고 나는 거기에 몰입하는 인물이다. 그렇긴 하지만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영화는 관객과 무엇을 나누려 하고 있고, 그 안에서 인물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구나, 라는 걸 생각하면 이 시대에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관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캐릭터 개인을 세세히 표현하는 것과 이 시대 여성들의 공감대를 담아내는 것이 따로 과제로 오는 게 아니라 함께 묶여서 전체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고민은 단지 한 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만들기라는 작업으로만 분리되지도 않는다. 다 녹아져 있고 서로 영향을 미쳐서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작품 선택과 그 안에서 말투를 바꾸고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것, 이같은 여러 결정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지금의 선택과 결정은 결국 현재의 문소리의 여러 복합적인 상황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배우라는 것은 반은 선택되는 것이고, 그 나머지가 내 의지와 선택이니 딱 잘라서 말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 안에는 내 사고들이 반영된다. 예를 들어 내가 <효자동 이발사>(2004), <사과>(2005), <가족의 탄생>(2006)을 연달아 했는데 매니지먼트에서 매니징했으면 그렇게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때는 “나, 주연으로 데뷔한 배우야”, “영화 <오아시스>로 상도 탔어” 같은 자만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고, 큰 영화가 아니라 작지만 다른 결이 있는 영화를 하는 게 중요했다. 그 시기에 어떤 생각으로 그 선택을 했는지 지나고 나서 보니 그제야 선명해지더라.

-최근에는 교수로, 연출자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후배 배우들에게 길을 제시하는 선배라는 지점에서 문소리라는 아이콘을 향한 기대도 있다.

=후배들이 내 이야기하면 뜨끔뜨끔하다. ‘선배님처럼 하겠다’가 아니라 ‘문소리는 좀 달랐다, 그런 건 좀 좋았다’ 이런 방향의 평가라면 좋겠다. 부담은 있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내가 그 바람을 소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요구 때문에 힘들 수도 있는데, 어떤 힘이 느껴지면 그 힘을 원심력처럼 이용해 한번 돌아볼 수 있다. 그것도 내 역량이지 싶고 잘해야지 싶다. 교수직은 조만간 그만둘 것 같다. 이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제는 또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 아직 현장에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웃음)

-연출자로서의 타이틀은 현장에서 연기를 할 때 어떤 방향이든 영향을 미칠 것 같다. 스스로 의식할 수도 있고, 동료들이 주지시켜줄 때도 있을 것 같다.

=한번은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냈더니 장률 감독님이 “오, 문 감독 좋은 생각이야” 하시더라. “문 감독 어떻게 하면 좋겠어?” 하고 묻기도 하시고, 조용히 해도 될 이야기를 그렇게 크게 하신다. (웃음) 요즘은 아예 문 감독 아니면 문 교수로 칭하시더라. 의논하려는 마음인 것은 아는데 혹여 그 말에 스탭들이나 상대 배우들이 영향을 받아 그들에게 어려운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안 그래도 요즘 나이가 드니 그들이 나를 보고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지난번 <메기>(2018) 찍을 때 스크립터가 모니터를 막 때리면서 “선배님만 오시면 에너지가 생기는지 자꾸 모니터가 작동이 안 돼요”라고 근거 없는 말을 하더라. (웃음)

-얼마 전 차기작인 <배심원들>(감독 홍승완) 촬영을 마쳤는데, 여성 재판장 역할이다. 앞서 말한 현재 배우 문소리의 위치, 고민, 판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선택이라 기대가 크다.

=첫 국민 참여 재판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다. 재판장 역할이라 내가 주인공인 줄 알았지. (웃음) 그런데 이 영화는 배심원들이 끌어가는 반응, 결과가 중요한 작품이다. 나는 변화하지 않는 사회의 틀을 대변하는, 어떻게 보면 일종의 안타고니스트다. 내년 초에 들어갈 새 영화의 프리 프로덕션 작업으로 올겨울은 바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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