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18 겨울 블록버스터 한국영화①] <마약왕> 제작기 - 김진우 프로듀서, 고락선 촬영감독, 조화성 미술감독에게 듣다
2018-12-19
글 : 김소미
1970년대 그 남자의 흥망성쇠

1970년대 초,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마약왕의 존재는 시대의 격동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와 같았다. <마약왕>은 배우 송강호의 압도적인 부피감이 만들어낸 인물 이두삼을 통해, 오로지 그 시절에만 가능했던 성공과 몰락을 그린다. 제작진에겐 일반적인 고증으로 대체할 수 없는, 소위 ‘마약왕’만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 주요 과제였다. 김진우 프로듀서의 말대로 “한 남자와 시대의 흥망성쇠라는 방대한 소재를 어떻게 러닝타임 안에 다 담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이들은 이두삼이 거머쥔 화려한 부와 내면의 분절을 드러내는 거대 별장을 꾸몄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서양식 문화를 즐겼을 이두삼의 세계에 현대적인 컬러감을 불어넣었다. 시대극을 새롭게 만드는 데에는 그 어느 때보다 공들인 상상력이 필요할 터, 그 과정의 세부를 듣고자 김진우 프로듀서, 고락선 촬영감독, 그리고 조화성 미술감독에게 <마약왕>의 제작기를 물었다.

1. 흑과 백의 밀실

거대한 사업 공간에 갇혀 있는 듯한 이두삼(송강호)의 모습이 정점을 이루는 곳이 영화 후반의 배경이 되는 대저택이다. 부산 민락동을 모티브로 만리동 별장으로 불리는 이 공간은 실제로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한 주택에서 촬영되었다. 외부인을 경계하기 위해 집 벽면에 CCTV를 한가득 설치해 놓은 이두삼은 “집이 아닌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 속에 살고 있다”. 조화성 미술감독은 많은 이들이 거론하는 <스카페이스>(1983)의 분위기보다는, 히틀러와 같은 실제 역사 속 독재자들의 공간에서 뉘앙스를 차용했다. 메인 공간인 2층의 집무실은 블랙 컬러와 대리석으로 통일했다. 넓은 공간과 큰 책상, 그 안을 채우는 묵직한 색감은 “공간 속에서 인물에만 시선이 집중되게 만든다”. 거대한 창문 또한 오로지 외부의 침입을 처리하는 용도로만 쓰일 뿐, 내내 닫혀 있다. 또 조화성 미술감독은 집무실 바닥과 천장을 모두 대리석으로 처리해 “화면 곳곳에서 이두삼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치게 했다”. 이는 2층과 완전히 대비되는 백색의 공간, 지하에 숨겨진 마약 제조 및 보관 공간도 마찬가지다. “약제실의 가장 안쪽 공간은 스틸 소재를 활용해 백색밀실처럼 만들었다. 오로지 이두삼만 출입할 수 있는 이 공간에는 그의 모습이 조금 더 일그러진 형태로 사방에 투영된다.”

2. 1970년대를 위한 로케이션

<마약왕>의 메인 테마곡 중 하나는 1973년 발표돼 ‘저속한 창법’을 이유로 금지곡에 지정된 김정미의 <바람>이다. 마약을 복용하고 공연하거나 혹은 그러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 같은 환각적인 분위기가 1960~70년 사이키델릭 록이라는 이름으로 음악계를 강타할 당시, 김정미의 콧소리와 자유로운 춤은 유신헌법의 검열 아래 자취를 감춰야만 했다. 이두삼이 주목한 것은 마약의 경제가치이지만, 그 또한 물밀 듯이 다가온 새롭고 금지된 세계에 매료된 모습을 보인다. 엄혹한 시대 안에서 마약 유통을 거대 사업체로 꾸리고 약 10년간 시대를 풍미한 남자는 보통 사람들과 어떻게 다를까? 김진우 프로듀서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해답이 있다”고 봤다. 이두삼과 고락을 함께하는 주변 인물들의 자연스러움까지 포섭하는 것은 견고하게 구현된 공간의 힘일 것이라 믿었다. “수적으로 1970년대 배경의 한국영화가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제작팀이 고전을 겪기도 했던” 과정이었다. “시대의 공기를 살리되 재연에 머무르지 않고, <마약왕>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 그것이 <마약왕>의 무기였다. 따라서 중요한 날에는 한복 입고 고무신을 신은 1970년대 일반 서민들의 모습과 달리, 이두상은 마약왕으로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답게 미국식의 문화도 빠르게 즐겼을 것이라 판단했다. 상류층 파티장에서 로비스트 김정아(배두나)와 만나는 장면 등은 “그 시절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은 강렬한 네온사인을 넣는 등 고증에 어긋나는 현대적 감성을 허락했다”.

· 제작팀의 유랑기

“99회차였나, 100회차였나?” 김진우 프로듀서의 기억대로라면 어느 쪽이든 대단한 촬영장이었다. 2017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에 걸친 100회차 촬영을 마친 <마약왕>팀은 그동안 부산·순천·대전·군산·목포·고성·울진 등 최적의 로케이션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다양하게 퍼져있던 로케이션 장소들을 하나의 시대톤으로 유지시키기 위해 제작팀의 차에는 언제나 모래포대가 가득했다. 노련한 신참 검사 김인구(조정석)가 다방 거리에서 마약 중간책을 단속하는 장면은 경북 의성군 탑리리에서 찍었다. 1970년대를 기억하는 동네 노인분들이 제작진에게 시대고증을 해주기도 했다고. 각종 표지판이나 도로에 새겨진 글씨들을 없애기 위해 “일단 어디를 가든 모래로 덮었다. 아침에 도로 전체에 뿌리고 저녁이면 다시 다 치우는 작업의 반복이었다”. 제작팀의 노고는 관객에게 과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2018년의 흔적을 지우고 시대 배경을 입히는 데 가장 기본이자 필수였다.

3. 인물을 대변하는 미술

조화성 미술감독은 “시각적인 요소를 통해 이두삼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생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조화성 미술감독에게는 이두삼의 출발점, 그러니까 남들과 비슷한 소시민적 삶의 모습 또한 중요한 근거지였다. 본격적으로 마약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두삼과 아내 성숙경(김소진)이 살던 집의 형태는 “번듯하게 자력으로 얻은 집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여유공간에서 대가족이 엉켜 사는 공간으로 표현했다”. 매우 좁고, 다른 공간과 독립성이 없는 집이다. 따라서 “남루해 보일 수 있지만 벽지나 기타 소품들에 대한 컬러 배치들은 그 인물들이 생기발랄하게 산다는 느낌을 전하기 위해 다채롭게 구성했다”.

4. 강렬한 컬러

이두삼의 성공이 밝고 찬란하게만 보였던 어느 시기, 조화성 미술감독은 그의 최고점을 구축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바로크 음악학원을 꼽았다. 그가 아내 성숙경에게 번듯이 차려준 음악학원으로, 성숙경은 이곳에서 당시로서는 부의 상징 중 하나였던 피아노를 가르친다. 꿈같은 시절을 표현하기 위해 조화성 미술감독은 1970년대와는 별개로 다양한 색감의 영화를 연구했다. 특히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좋은 친구들>(1990), <캐롤>(2015)을 참고하며 컬러감을 강렬하게 주고자 했다. 한편으로 영화 후반부에 이두상이 거처를 옮긴 대저택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어떤 권력 혹은 사업의 집결지”로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이두삼의 사업이 성공 가도에 오를수록 자연스레 집의 면적은 점점 넓어진다. 더욱 화려하고 대담한 색채를 쓸 법도 한데 대가족과 생활하다가 점차 고독한 자리를 자처하는 이두삼의 입지를 보여주기 위해 “공간이 커질수록 오히려 색감은 단조롭게 절제된다”. 협소해도 함께 있을 때 행복한 공간과 거대하지만 홀로 있는 공간이 주는 공허함을 대비시킨 미술감독의 결정은 후반부로 갈수록 선명한 효과로 부각된다.

· 미술감독에게 영감을 준 자료

조화성 미술감독이 작품을 준비하면서 유독 기억에 남았던 자료는 실존 인물 이두삼의 검거 기사였다. 영화 속 만리동 별장에 장미꽃밭을 만드는 데 일조한 자료였다. 실존 인물의 경우, 경찰들이 저택에 침입해서 지하 작업장을 찾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는데, 그렇게 찾은 작업 공간은 무척 좁았다고 한다. “과거에 돼지우리에서 마약을 만든 이유가 냄새를 덮으려는 목적이었는데, 그 사람은 집에 장미꽃밭을 만들어놓고 그 사이에 환풍기를 설치해 장미향으로 냄새를 중화했다. 장미꽃들 사이로 마약 연기가 새어나오는 이미지가 무척 매혹적이었다.”

5. 붉은색의 욕망

성큼 도래한 낯선 시대, 다양한 사람들, 오직 잘 살아보자는 미명 아래 묵인되는 범죄들…. 이두삼이 극단적인 행동을 지속할수록 그의 내면에서 욕망과 불안이 출렁이는 감각은 고락선 촬영감독이 강조한 색감을 통해 드러난다. 로비스트 김정아와 로맨스를 키워갈수록 컬러와 콘트라스트가 더욱 풍성해지는 등 고락선 촬영감독은 “레드와 그린 컬러를 주조로 색을 과감하게 설계해나갔다”. 특히 일본 긴자에서 이두삼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장면은 미리 네온사인을 디자인해 컬러감을 극대화했다. 화면이 붉은색으로 물들수록 이두삼은 과거와 결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지대로 나아간다. 전남 목포의 공장 지대에서 촬영한 이 장면은, 레트로한 SF물을 연상시키는 조명 덕분에 결과적으로 매우 이국적인 그림이 완성됐다.

6. 단순한 촬영의 힘

“<마약왕>을 촬영할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최대한 심플하게 촬영하는 것이었다.” 관객이 인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촬영만큼은 최대한 단순하고 명확하게 다가가길 원했던 고락선 촬영감독의 판단이다. 일부러 너무 무겁거나 멋을 낸 촬영을 지양한 결과, <마약왕>에서 그 무엇보다 복잡다단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은 인물과 시대 그 자체로 남았다. 색감과 톤 조절에 있어서도 <마약왕>은 의외의 기운으로 굴러갔다. “처음엔 누아르를 생각하고 준비했는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 <마약왕>만이 가진 의외의 생기가 있었다.” 고락선 촬영감독은 로버트 리처드슨,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의 영화들을 레퍼런스로 꼽았다. “특히 로버트 리처드슨의 작품을 보면 하이라이트 등을 굉장히 잘 사용해서 통통 튀는 활기가 있다. 로저 디킨스의 경우에는 자연스러운 느낌을 매우 뛰어나게 표현하므로 두 촬영감독의 장점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 무척 이상적일 것이라 판단했다.”

· 촬영감독이 사용한 카메라와 즐겨 쓴 렌즈

고락선 촬영감독은 아리 알렉사 XT 카메라를 사용했다. 아리 마스터 애너모픽렌즈를 주로 사용했고, 영화 초반부는 1970년대의 시대감을 강조하기 위해 노란색의 필터를 더했다. 특히 이두삼이 살인 후 처음 마약을 시도하는 장면은, 그의 눈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아리 자이스 매크로 렌즈를 활용했다. 실물 크기 이상을 담아내는 압도적인 근접 촬영을 보여준다.

사진 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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