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다를 가엽다고 읽는다.”
가벼운 것은 쉽게 날아가고 흩어지고 사라진다. 박소란의 시 <가여운 계절>은 가볍다를 가엽다고 읽으며 시작한다. 가벼운 것과 가여운 것이 가없이 뒤섞인다. “허공에서 길 잃은 구름처럼 새처럼 가여운 것이 있을까 하고”, “플라타너스의 바랜 옷자락을 붙들고 선 저 잎새는 어제보다 오늘 더 가엽고”. 하지만 아니다 그 둘이 섞이는 게 아니다. 가벼운 것을 가여운 것으로 읽었을 뿐이다. 행을 따라 뒤로 가니 “조금도 가엽지 않은 것,/ 가엽다를 가볍다로 읽어야 한다”에 가닿는다. “위층에서 걸어내려오는 너의 인사는 깃털 같다/ 내게서 황급히 멀어지는 네가/ 나는 가볍다”.
박소란의 시는 인간 아닌 타자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때 서늘한 온도의 목소리를 구사하고, 그것은 오싹하다. <손잡이> 역시 그런 시 중 하나다. “마치 사랑을 하는 사람들처럼” 그녀가 잡은 것을 그가 잡는다, 그가 잡은 것을 그녀가 잡는다. 손잡이를 잡는다. “문의 순순한 가슴팍을 두드리며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들어오고 나간다”. 사람이 등장할 때도 죽은 사람일 때가 박소란의 시 같다. “죽은 엄마를 생각했어요/ 또다시 저는 울었어요 죄송해요/ 고작 감기일 뿐인데”로 시작하는 <독감>은 물론, <위령미사> 역시 그렇다. <위령미사>의 주인공은 가벼운, 그래서 가여운 존재일 안토니아다. “깨어나보니/ 그곳은 노래의 방이었다/ 형제 자매가 둘러앉아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누군가 말한다. “쉿, 안토니아/ 지금은 미사 중이란다”. 조금 혹하게 요즘 식으로 말해보자면 반전이 있는 시일 텐데, 가벼운 안토니아를 위해 가여운 내가 노래를 부른다. 안토니아는 빛을 따라 떠나갈 것이다. 혹은, 떠나야만 한다.
죽어 있는 것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살아 있는 것은 달아난다. 거기에 박소란의 시어가 싹튼다.
모르는 사이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모르는 사이>, 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