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를 빛낸 영화 30편④] <휴일> <별들의 고향> <낮은 목소리>...
2019-04-10
글 : 장영엽 (편집장)
<씨네21> 창간 24주년,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 스페셜... 한국영화를 빛낸 영화 30편과 그 감독들 이야기

● 이만희의 <휴일>

제작연도 1968년 / 출연 신성일, 전지연, 김성옥, 김순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세계관을 구축한 한국영화 감독을 떠올릴 때, 이만희 감독의 이름은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다. 그는 엄혹한 시대의 풍경 속에서도 장르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으며, 검열의 압박 속에서도 한국영화사에 빛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을 완성해냈다. 또한 그는 15년 동안 50여편의 영화를 만든 다작의 감독이었고, 대중성과 작가로서의 개성을 두루 갖춘 수재였다. 이만희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1960년대 한국영화를 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의 걸작 <휴일>은 흥미로운 히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1960년대 당시 ‘암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를 이유로 상영이 금지됐던 이 영화는 2005년에 필름이 발견돼 처음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휴일>은 휴일마다 만나는 가난한 연인, 허욱(신성일)과 지연(전지연)의 어느 일요일 하루를 조명한다. 빈털터리인 허욱은 임신한 지연의 중절 수술 비용을 구하기 위해 서울 거리를 헤맨다. 하지만 연인은 죽고 남자는 혼자 남는다. “서울, 남산, 전차, 술집 주인아저씨, 하숙집 아줌마, 일요일”을 호명하며 다가올 아침을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으로 끝맺는 <휴일>은 희망의 내일을 기약하기보다 영원한 심연 속에 주인공을 남겨두는 쪽을 택한다. 이만희 감독 특유의 ‘무드’를 만끽할 수 있는 영화로, 1960년대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극장 미개봉작임에도 2005년 <씨네21> 한국영화 결산좌담에서 정성일, 허문영, 김소영 평론가가 ‘올해의 영화’로 꼽기도 했다.

이 영화도 주목! <귀로>(1967)_ 이만희 감독의 뮤즈, 문정숙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 전쟁으로 불구가 된 남편과 우연히 알게 된 젊은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의 심리와 도시의 황량한 풍경이 맞물린 감각적인 멜로드라마다.

● 이장호의 <별들의 고향>

개봉 1974년 4월 26일 / 출연 안인숙, 신성일, 윤일봉, 백일섭

연출을 제대로 배운 적 없는 신인감독이, 서울 관객수 10만명을 넘긴 영화를 손가락에 꼽던 1970년대에 데뷔작으로 무려 46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별들의 고향>의 이장호 감독이 이 놀라운 사연의 주인공이다. 신상옥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었던 그는 당시 충무로에서 모두가 탐내던 최인호 작가의 인기 청춘 소설 <별들의 고향> 판권을 거머쥐는 행운을 차지했다. 하지만 행운을 성공으로 만든 건 청년 이장호의 패기와 감각이었다. 남자들과의 이별에 상처받고 호스티스가 된 경아(안인숙)와 풍류를 즐기는 화가 문호(신성일)의 로맨스를 다룬 <별들의 고향>은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하는 감각적인 편집과 개성 있는 남녀주인공, 가수 이장희의 O.S.T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당대 청춘영화 붐을 주도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영자의 전성시대>(1975)와 <겨울여자>(1977) 같은, 젊은 여성이 도시의 비정한 풍경 속에서 순수함을 잃어가는 내용을 다룬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유행했다. 1975년 하길종, 김호선 감독 등과 ‘영상시대’를 결성해 뉴 시네마 운동을 주도한 이장호 감독은 충무로의 기존 관습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세대, 젊은 감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1980년대 <바보선언> <바람불어 좋은 날> 등의 작품에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투영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즉흥적으로 촬영하고 편집실에서 구성을 시작한 <별들의 고향>은 이장호 감독의 표현대로 “아마추어리즘의 승리”이자 젊은 감독의 패기가 영화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영화도 주목! <바람불어 좋은 날>(1980)_ 시골에서 상경한 세 청년의 꿈과 좌절을 그린 영화로, 80년대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전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개발이 한창인 서울 강남의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 변영주의 <낮은 목소리>

개봉 1995년 4월 22일 / 출연 김순덕, 박옥련, 이영숙, 박두리, 강덕경, 송판임, 하군자, 홍강림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는 <낮은 목소리> 전과 후로 나눠짐이 분명하다.” 2000년 <씨네21>은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 특집 기사(243호 특집 ‘<낮은 목소리>에서 <숨결>까지’)를 통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변영주 감독이 연출한 <낮은 목소리> 3부작은 극장에서 개봉한 한국 최초의 다큐멘터리(<낮은 목소리>)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증언하게 함으로써 타자의 시선으로 기록된 역사를 당사자인 여성의 시각으로 다시 쓰는 성취를 거두었다. 더욱 기억할 만한 점은 이 세편이 같은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동어반복의 덫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은 연작을 이어갈수록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 등장인물과 관객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지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1편에서 자신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털어놓던 할머니들은 2편에서 카메라를 통해 일상을 기록하려 하고, 3편에서는 직접 인터뷰어로 나서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간다. 변영주 감독은 “다큐멘터리영화란 사랑하는 피사체에 대한 러브레터”라고 표현한 일본 다큐멘터리스트 오가와 신스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낮은 목소리> 1편은 50년간 봉인됐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사연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하다. 해소되지 않은 울분을 안고 쓸쓸한 삶을 살아가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세월만큼이나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도 주목! <화차>(2012)_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원작으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여성의 이야기다. 변영주 감독은 그녀를 쉽게 동정하거나 연민하지 않으며,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 사회와 젠더와 계급 문제를 명민하게 녹여내고 있다. 배우 김민희를 재발견하게 한 작품.

● 허진호의 <8월의 크리스마스>

개봉 1998년 1월 24일 / 출연 한석규, 심은하

‘사랑한다’는 그 흔한 말 한마디 없이 한국 최고의 멜로영화 반열에 오른 작품이 있다.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자의 인생 말미에 야속하게 찾아온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절제된 연출과 섬세한 심리묘사로 ‘허진호식 멜로영화’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만들어냈다. 변두리 사진관에 근무하는 사진사 정원(한석규)은 단속차량 사진의 필름을 맡기기 위해 자주 사진관에 들르는 주차 단속요원 다림(심은하)에게 자꾸만 마음이 간다. 하지만 조금씩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는 스무살의 빛나는 청춘을 보내고 있는 다림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자신이 없다. 당대 한국영화의 얼굴이었던 한석규의 담백한 모습과 청춘 배우 심은하의 풋풋한 미소는 죽음이라는 테마의 무게감을 상쇄하는 동시에 이별의 여운을 더욱 짙게 만든다. <씨네21>은 1998년 연말 결산 ‘올해의 영화인’ 설문(183호)에서 두 배우를 각각 올해의 남자배우, 올해의 여자배우로 선정한 바 있다. ‘카메라의 마술사’ 유영길 촬영감독(이 작품이 그의 유작이다)의 카메라는 사랑하는 이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남자주인공의 마음을 반영하는 듯 거리감을 두고 두 남녀를 응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절제의 태도야말로 보는 이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일등 공신이라는 점을 <8월의 크리스마스>는 작품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한국영화계에 담백하고 세련된 멜로영화의 출현을 알린 이 영화는 2013년 한국 상업영화로는 최초로 재개봉해 21세기 관객을 만났다.

이 영화도 주목! <봄날은 간다>(2001)_ “라면 먹고 갈래요?”부터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까지 한국 멜로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를 배출한 작품. 사랑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는 <봄날은 간다>는 계절의 변화와 맞물려 변화하는 관계의 양상을 담담하고도 냉정하게 응시한 걸작 멜로드라마다.

●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개봉 2001년 10월 27일 / 출연 이얼, 박원상, 황정민, 오광록, 오지혜, 류승범

‘여성감독의 시대가 오는가.’ 2001년 10월 <한겨레21> 기획 기사 제목이다. 80여년의 한국영화 역사에서 10명이 채 되지 않았던 여성감독 수는 2001년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정재은 감독이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로 영화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고, 이정향 감독이 차기작 <집으로…>를, 이미연 감독과 박찬옥 감독이 각각 장편 데뷔작 <버스, 정류장>과 <질투는 나의 힘>을 준비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한국영화사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여성감독들 가운데서도 임순례 감독은 단연 주목받는 존재였다. <세 친구>(1996)로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그는 부산, 전주, 런던, 도쿄, 밴쿠버 등 국내외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은 두 번째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통해 충무로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씨네21>에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대한 리뷰를 기고한 심영섭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명실공히 올해 대한민국 영화계가 거둔 최고의 수확”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영화 <친구>처럼 말초적이며 자극적인 설정 없이 꿈과 현실의 간극을, 변질된 우정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담백한 진심의 힘을, 새로운 시각을 가진 연출자의 필요성을 일깨워줬다. 영화 개봉 당시 조기 종영을 우려한 관객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해 장기 상영을 촉구했고, 이에 제작사 명필름은 시네코아를 대관해 상영을 이어갔다. 말하자면 21세기 ‘대관 문화’의 시초라 할 영화가 바로 <와이키키 브라더스>다.

이 영화도 주목!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_ 여성감독이 30대 여자배우들을 캐스팅해 만든 핸드볼 영화. 2008년 4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전체 11위를 기록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한국영화계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던 모든 존재들의 통쾌한 승리다.

● 박찬욱의 <올드보이>

개봉 2003년 11월 21일 / 출연 최민식, 강혜정, 유지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어떤 작품이 최고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한국영화사에 미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단연 <올드보이>가 최고다. <올드보이>는 <복수는 나의 것>과 <친절한 금자씨> 사이에 위치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다. 200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전세계가 한국 장르영화를 주목하게 했고, 잠재력 있는 한국 영화감독들의 할리우드 진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쓰치아 가론, 미네기시 노부야키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올드보이>는 영문도 모른 채 15년간 독방에 감금된 남자, 오대수(최민식)의 복수를 다루는 영화다. 누가 가뒀는지보다 왜 가뒀는지에 주목하는 영화는 정교하게 설계된 양식과 역동적인 액션, 극적인 드라마에 힘입어 이야기의 스케일을 점점 확장해나간다. <복수는 나의 것>이 건조하고 차가웠다면, <올드보이>는 뜨겁고 강렬한 복수극이다. 창작자들이 타협하지 않고 야심만만하게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해나갔던 2003년 한국영화계의 풍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 등의 영화가 쏟아져 나왔던 그해를 박찬욱 감독은 “상업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작가적인 비전과 상치되지 않던 시절”이라 회고한 바 있다. <올드보이>는 2003년 12월 <씨네21> 연말 결산에서 ‘올해의 한국영화 베스트’ 5위에 선정됐다.

이 영화도 주목! <아가씨>(2016)_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스토커>를 잇는 박찬욱 감독의 ‘소녀 3부작’ 마지막 작품.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칙과 틀을 경쾌하게 뛰어넘는 여성들의 활약상을 정교한 플롯과 완벽에 가까운 프로덕션 디자인을 통해 구현해냈다. 대형 신인 김태리를 발굴했으며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벌컨상(칸국제영화제가 경쟁부문 초청 작품들 중 최고의 기술 스탭에게 수여하는 상)을 안겨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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