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를 빛낸 영화 30편③] <오발탄> <칠수와 만수> <반칙왕> <지구를 지켜라!>...
2019-04-10
글 : 송경원
<씨네21> 창간 24주년,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 스페셜... 한국영화를 빛낸 영화 30편과 그 감독들 이야기

● 유현목의 <오발탄>

개봉 1961년 4월 13일 / 출연 김진규, 최무룡, 서애자, 문정숙, 김혜정, 윤일봉

영화는 시대마다 운명을 달리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헤아리기 힘든 걸작 중에서도 등대처럼 항상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길잡이가 되어주는 영화가 있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시금석으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영화 중 하나다. 이범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발탄>은 한국전쟁 전후 한국 사회의 그림자를 조망하고 시대의 부조리를 관통한다. ‘한국영화사 최고의 리얼리즘 영화’나 ‘해방 후 한국영화 최고 걸작’이라는 수식어가 난무하지만 사실 이같은 표현만으로 이 영화의 진면목을 짐작하기엔 오히려 모자란 감이 있다. 대표적인 리얼리즘 영화라 하지만 <오발탄>의 연출 스타일은 다분히 표현주의적 경향을 띤다. 상징적인 몽타주,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 등 과감한 연출을 시도한 유현목 감독은 당대 유명 스타들, 고뇌하는 지식인 김진규와 거친 반항아 최무룡의 아우라를 고스란히 활용하며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 요컨대 <오발탄>은 예술적 가치로 박제된 영화가 아니라 당대 관객의 눈높이에 맞춰 함께 호흡하는 영화다. 시적이면서 동시에 사실적인, 현실 반영으로서의 영화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사실을 어떻게 규합하여 나의 현실 안에 녹여낼 것인가. 그 끝에 도달할 진실은 무엇인가. <오발탄>은 이 해묵은 질문에 대한 오래된 대답이다. <오발탄>은 리얼리즘의 가치와 본령을 제대로 담아낸 걸작으로서 계속 소환되어야 마땅하다.

이 영화도 주목! <장마>(1979)_ 문예영화, 분단과 이데올로기, 신 앞에 선 인간의 운명으로 압축되는 유현목의 영화 세계 후기 대표작. 이데올로기, 민족, 가족, 샤머니즘적 요소를 한자리에 녹여낸 ‘한국’에 대한 영화.

●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

개봉 1988년 11월 16일 / 출연 안성기, 박중훈, 배종옥, 나한일

예리한 통찰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선보여온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이다. 영화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혹은 바꿔야 하는가. 아마도 박광수 감독에게 영화란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행위일 것이다. 감독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미 각자의 답을 내놓았을 이 해묵은 질문을, 해결했다고 미뤄두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 박광수 감독 특유의 통찰력은 거기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대화의 출발점에 <칠수와 만수>가 있다. 반공법을 위반한 아버지 때문에 건물에 그림을 그리며 근근이 살아온 만수(안성기)와 술주정꾼 아버지를 떠나 서울에 상경한 칠수(박중훈)는 자신들을 배척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간다. 연좌제, 빈부격차 등 1980년대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두 젊은이의 고뇌와 좌절을 통해 직설적으로 드러낸 블랙코미디라 할만하다. 특히 암울했던 분위기와 대조되는 칠수와 만수의 해맑은 모습은 그 낙차가 클수록 시대의 비극과 혼란을 깊게 각인시킨다. 오종우 원작의 동명 희곡을 각색했는데 안성기, 박중훈 두 배우의 밝은 에너지가 암울한 시대상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이루면서도 한폭의 그림처럼 조화롭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비결은 이 답답한 부조리극에서 영화만이 포착할 수 있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담아낸 박광수 감독의 카메라에 있을 것이다. <칠수와 만수>는 80년대라는 시대, 박광수라는 감독의 교차점에서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있다.

이 영화도 주목!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_ 박광수 감독의 사회비판적 문제의식의 절정에서 꽃피운 영화.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그리되 함부로 그를 영웅시하거나 선동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바탕으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한다.

● 김지운의 <반칙왕>

개봉 2000년 2월 4일 / 출연 송강호, 장진영, 박상면, 정웅인, 장항선, 김수로

김지운 감독을 말할 때 흔히 붙는 수식어 중 하나가 ‘스타일리스트’다. ‘영화의 스타일’을 정의하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요약하면 ‘장르’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지운 감독을 말하기 위해선 바로 이 장르를 가지고 노는 능력을 빼놓을 수 없다. 김지운 감독이 한국영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장르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감독은 누가 뭐라 해도 김지운이다. 그는 해당 장르를 완전히 장악한 후 한끗 다르게 비틀어내는 데 능숙하다. 그런 김지운 감독의 초기작을 관통하는 핵심은 다름 아닌 코미디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에서 코미디와 잔혹극을 뒤섞은 독특한 결과물을 선보인 김지운은 두 번째 영화 <반칙왕>에선 소박한 자아찾기의 드라마와 소시민의 얼굴을 활용한 캐릭터 코미디로 우화와 동화의 경계에 선다. 평범한 회사원이 반칙 레슬러로 각광받는다는 설정은 그야말로 ‘평범’하지만 코미디라는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영화 곳곳에 자신의 취향과 인장을 드러낸다. 소시민 임대호(송강호)의 얼굴을 찍을 땐 차분했다가, 지지부진한 일상을 찍을 땐 애잔하고, 레슬링 경기 장면을 찍을 땐 초고속 카메라를 활용해 어떤 액션영화보다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웃음에 집착하지 않아서 더욱 진해지는, 슬퍼서 웃긴 코미디.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웃음이란 이런 것이다.

이 영화도 주목! <장화, 홍련>(2003)_ 김지운 감독은 언제나 장르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코미디, 누아르, 서부극 등 다양한 장르를 변주하여 자신의 영역 안에서 소화했던, 세상 어디에도 없을 김지운식 호러영화. 역시나 익숙한 듯 색다르다.

●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개봉 2003년 4월 4일 / 출연 신하균, 백윤식, 황정민, 이재용, 이주현, 기주봉

<지구를 지켜라!>는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바람난 가족> 등 2003년 개봉한 쟁쟁한 영화들을 제치고 ‘<씨네21>이 선정한 올해의 영화’ 베스트 1위에 올랐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기발하고, 엽기적인 데뷔작”이라는 김봉석 평론가의 말에 따르자면, 2003년 단 한편의 영화만이 영화사에 기록될 수 있다고 할 때 장준환 감독은 첫 영화에서 이미 그 영광을 달성했다. 괴이한 상상력과 B급 감수성으로 채워진 <지구를 지켜라!>는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그야말로 외계에서 침입한 것 같은 영화였다. 그 기발함이 어떤 수준이었냐면 항상 새로움에 대한 갈증에 시달리는 영화계에서 당대 소화하기 버거워 찬사의 마음을 담아 ‘반역적’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외계인 군대가 지구를 침략할 것이라고 믿는 병구(신하균)가 사장(백윤식)을 납치, 고문해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는 이야기는 일견 황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물파스와 때밀이 수건으로 지구를 지키겠다는 병구의 소박하고 무모한 망상은 기존 한국영화가 스스로 그었던 한계를 돌파하는 비약의 순간을 선사한다. 너무 앞서간 탓에 흥행에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후 장준환 감독은 2013년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연출할 때까지 항상 차기작이 기대되는 감독으로 손꼽혔다. 황당무계하지만, 아니 그럴수록 더욱 탁월하게 다가오는 상상력은 재기발랄한 농담 이상의 단단한 현실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영화도 주목! <1987>(2017)_ 이미 증명된 연출자였지만 대중과의 호흡에서 아쉬움을 느꼈던 장준환 감독이 대중성과 예술성,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음을 드디어 증명했다. 주제와 형식, 필요와 재미의 균형감각이 탁월한 영화.

● 임상수의 <그때 그 사람들>

개봉 2005년 2월 3일 / 출연 한석규, 백윤식, 송재호, 김응수, 조상건, 권병길

현재의 문제를 현실의 무대에서 다룬다. 당연하게 들리지만 의외로 희귀한 덕목이다. 좀처럼 현대사를 조망하지 못했던 한국영화에서 10·26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 김 부장(백윤식)이 대통령(송재호)을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의도치 않게 사건에 휘말린 김 부장의 오른팔 주 과장(한석규)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상사로부터 명령받은 일이기에 어쩔 수 없다. <그때 그 사람들>은 역사를 고증하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다. 임상수 감독의 관심사는 역사에 씌워진 권위를 조롱하고 권력의 천박함을 까발리는 쪽에 가깝다. 금기시된 사건을 지극히 인간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린 이 영화는 신성시된 역사의 자리에 개인의 얼굴을 복원시킨다. 수사의 기교를 벗어던지고 사건과 인물의 표면에 몰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물은 전적으로 임상수 감독의 개성에 힘입은 바 크다. 임상수 영화는 인간의 천박하고 비루한 욕망에서 눈 돌리지 않는다. 그는 사건을 과장하거나 의미를 숭배하는 일 없이 언제나 낮은 자리에서 뒹굴며 이른바 풍속화의 시선에서 상황을 재현한다. 한편으로 임상수 감독은 언제나 웰메이드 장르영화를 추구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때 그 사람들>은 ‘재미있는’ 영화를 추구하는 감독의 욕망이 한국이란 상황을 만나 빚어낸 소중한 결과물인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도 주목! <바람난 가족>(2003)_ 가족 붕괴 한가운데에서 건져낸 도발과 해방. 미성숙한 남자들이 성숙한 여자들에게 바치는 반성문. 어떤 상황에서도 욕망의 밑바닥을 건드리고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감독의 솔직함이 빛을 발한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 이준익의 <왕의 남자>

개봉 2005년 12월 29일 / 출연 감우성, 이준기, 정진영, 강성연, 장항선

웬만큼 흥행했다 하면 관객 스코어 1천만이 당연시되는 요즘이지만 사실 이 숫자에는 얼마간 착시가 끼어 있다. 간혹 천만 영화 전체를 흥행작이란 카테고리로 한데 묶어버리기도 하는데, 모든 천만 영화가 산업적인 영향력을 남기진 않고 반드시 사회적 현상과 결합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 영화가 1천만명의 관객을 모은 과정과 방식에 있다. <왕의 남자>는 가장 적은 스크린 수로 시작해 천만 관객을 달성한 영화다. 관객의 평가와 입소문에 힘입어 밑바닥에서부터 점차 영향력을 넓혀간 드문 사례라는 말이다. 이건 <왕의 남자>의 텍스트가 두텁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다. <왕의 남자>는 기본적으로 목적한 바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성실한 영화다. 기존 사극의 딱딱한 분위기를 뒤집는 가운데 감독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된다. 동시에 거기에 머물지 않고 인물과 서사가 살아 움직이며 관객을 찾아간다는 점이 핵심이다. <왕의 남자>는 전통적인 사극의 연장선에서 영화를 즐기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개봉 당시 정치적 상황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읽어낸다. 사각관계의 멜로드라마로 영화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공길 역의 이준기가 발하는 중성적인 매력에 흠뻑 빠진 팬들도 적지 않다. 한편 잘 만든 캐릭터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스스로 생명을 얻어 걸어다니는 것처럼 이 희귀한 웰메이드 사극은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방식으로 다양한 관객과 만났다.

이 영화도 주목! <동주>(2015)_ <왕의 남자> 이후 대작에 대한 강박에 시달린 이준익 감독이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영화 본연의 목소리에 집중한 결과물. 대중과 흥행이라는 허상을 좇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을 때 허락되는 것들.

● 홍상수의 <북촌방향>

개봉 2011년 9월 8일 / 출연 유준상, 김상중, 송선미, 김보경, 김의성

<씨네21>과 홍상수 감독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다. 1998년 <강원도의 힘>을 시작으로 2018년 <풀잎들>까지, 홍상수의 모든 영화가 매해 <씨네21> 한국영화 베스트5에 올랐다. 홍상수 영화가 베스트5에 오르지 못한 건 2번뿐이다. 한번은 2016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 근소한 차이로 올해의 한국영화 6위에 선정됐고, 다른 한번은 베스트 집계를 하지 않던 시절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이다. 2편이 개봉한 해는 2편 모두 베스트5에 오른 일도 있었다. 말하자면 홍상수 영화는 그해 1위인지 아닌지를 다투거나 아니면 또 다른 홍상수 영화와 경쟁할 뿐이다. 때문에 홍상수 영화 중 1편을 고른다는 것만큼 어리석고 의미 없는 짓도 드물 것이다. 홍상수 영화의 거의 유일한 특징을 하나만 꼽는다면 (꽤 많은 사람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도 비슷한 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홍상수는 항상 변화하고 그의 모든 영화는 유일하다. 그럼에도 굳이 이 리스트에 하나를 올려야 한다면 <북촌방향>을 꼽고 싶다. 2011년 당시 3분의 2가 넘는 필자들의 압도적인 지지가 쏟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북촌방향>은 영화가 혹은 홍상수가 머무르지 않고 변화한다는 사실을 영화적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북촌방향>은 매일매일이 다 기억에 남아 있다”라는 감독의 말처럼 모든 시간이 영화가 되어 지금도 스크린 너머에 쌓여 있다.

이 영화도 주목! <강원도의 힘>(1998)_ 홍상수의 탄생. 정확히는 <씨네21>과 작가 홍상수의 만남. 한국영화에서 홍상수는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다는 걸 일깨워준 하나의 사건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에 대한 애정 고백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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