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
개봉 1991년 12월 21일 / 출연 문성근, 강수연, 김보연
당대의 정서와 가치관에서 매번 빠르게 앞서 나간 감독. 장선우는 1990년대 한국영화계에 매번 새롭고 충격적인 장면들을 안겼다. <경마장 가는 길>은 <우묵배미의 사랑>(1990)에서 사실주의의 정수를 보여준 이후 그가 나아가려는 새로운 지평을 도발적으로 입증한 영화다. 원작인 하일지 작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엘리트 캐릭터를 수식어를 최소화한 사실적인 묘사로 그려내면서 한국 문단에 포스트모더니즘, 누보로망 미학의 대두를 예고한 작품. 영화는 프랑스 유학중에 동거했던 문학박사 R(문성근)과 J(강수연)가 몇년 뒤 한국에서 소통 불능을 겪는 단순한 플롯을 따라간다. R은 만사를 제쳐두고 J와의 섹스에 골몰하지만, R의 문학평론을 베껴 신춘문예에 당선된 J는 시종 R을 밀쳐내며 그보다 학벌과 재력이 뛰어난 남자와 결혼을 준비한다. 답답하고 지친 R은 J에게 “너의 이러한 태도의 이데올로기는 뭐냐?”라고 소리친다. 섹스에 무슨 이데올로기까지 필요한가 싶은 이 대사는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코믹하게 드러내며 유행어로 떠오르기도 했다. 좁은 실내 로케이션, 클로즈업을 배제하고 관찰자적 거리를 유지하는 카메라, 긴 대사량과 롱테이크 등을 통해 한국적 리얼리티의 팽창을 주도한 장선우 감독은 그해 단성사에서 서울 관객 17만9820명을 동원하며 흥행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이 영화도 주목! <나쁜 영화>(1997)_ 이후 김기덕, 임상수 감독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이슈메이커 장선우 감독의 정점. 거리를 떠도는 10대들의 섹스, 폭력에 대한 적나라한 재현을 두고 외설 논쟁이 불거졌다. “굳이 구체적인 장면을 연출했어야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구체적인 장면이 아니면 추상적인 장면으로 보여주나?’라고 반문했다(<씨네21> 특집 기사,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 이창동의 <시>
개봉 2010년 5월 13일 / 출연 윤정희, 이다윗, 김희라, 안내상
인간의 도덕과 시의 숭고함은 공존할 수 있을까. 고통과 아름다움은 서로를 어떻게 껴안을 수 있을까. 데뷔작 <초록물고기>부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그리고 <버닝>까지. 평범한 일상의 안개를 걷어내고 한국 사회의 고통스러운 징후를 포착했던 이창동 감독의 재능은 특히 <시>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집약된 듯 보인다. 그가 고수해온 고전적이고 투박한 리얼리즘이 담긴 화면, <만무방>(1994) 이후 스크린을 떠났던 배우 윤정희의 귀환이 유독 각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영화에서 외손자와 둘이 살고 있는 60대 여성 양미자(윤정희)는 생애 처음으로 시 한편을 완성하려 한다. 서툰 시인의 언어가 고결한 세계를 꿈꾸기 시작할 무렵, 삶은 갑자기 그녀의 외손자가 여중생 집단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추악한 진실을 까발린다. 위로는 시가 있고 아래로는 인간의 부조리가 만연한 시험대에 오른 주인공 미자는, 끝내 타자의 고통을 저버리지 않는 결의를 지켜낸다. 전작 <밀양>보다 덜 가혹한 것은 물론, 지난 작품에 비해 조용하고 사소한 세계에서 출발한 영화지만 그 종착지는 높고 비상하다. 2010년 <씨네21>이 뽑은 올해의 한국영화 1위, 올해의 시나리오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전향하고, 영화진흥위원회가 0점을 준 시나리오로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감독. 이창동의 이름과 궤적은 현존하는 한국영화 감독 중에서 가장 역사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도 주목! <밀양>(2007)_ 성폭행 가해자의 가족이 시를 배우는 이야기(<시>) 이전에 유괴사건으로 아이를 잃은 뒤 구원의 빛을 좇는 여성의 이야기가 있었다. 지독한 고통과 용서, 그리고 지속되는 삶을 그렸다. 제60회 칸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전도연에게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안긴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