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단독] <페르소나> 현장기⑥ - 이지은, “내가 싫어할 수 있는 작품은 아예 없다”
2019-04-17
글 : 이화정
사진 : 씨네21 사진팀
<밤을 걷다> 촬영 현장(사진 최성열).

“정말 네편 현장에 다 오시는 거예요?” 취재에 응하고도 이지은이 막 영화를 시작한 자신을 향한 관심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문한다. 지난해 7월 <밤을 걷다>로 종묘 현장에서 처음 만난 후, <썩지 않게 아주 오래>의 포천, <키스가 죄>의 강화도, <러브 세트>의 안산에서 촬영 틈틈이 ‘배우 이지은’을 관찰했다. 첫 촬영의 긴장감부터 짧은 촬영의 아쉬움, 연습 시간의 고됨, 그리고 영화 현장의 즐거움에 대해, 현장을 거듭할수록 점점 변모하는 배우 이지은과 나눈 네번의 대화를 담는다.

2018.07.06

● "습득이 빠르고 사고가 유연해서 현장과 캐릭터에 금세 다가오는 배우, 그래서 욕심나는 배우."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정유미, <최악의 하루>의 한예리, 그리고 <더 테이블>의 정유미·한예리·정은채·임수정 등 작품마다 배우들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해온 김종관 감독은 배우 이지은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오늘 촬영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모니터 확인을 거의 안 하던데.

=드라마 할 때도 많이 보지 않는 편이다. 어딘가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면 소극적이 되어버려서. 내가 싫은 내 모습이 보이면 그때부터 위축된다. 좋지 않은 부분은 감독님이 말씀해주시겠지 생각하고 믿고 간다.

-드라마 현장은 익숙할 테지만, 그와 다른, 영화 현장에서만 느끼는 점이 있을 것 같다.

=같은 현장이지만 영화는 신기한 지점이 많다. 드라마는 풀숏을 찍고 그다음에 장면을 따는데, 영화는 그런 장면이 따로 정해져 있다. 그런 부분이 신기하고 재밌다. 김종관 감독님 특유의 스타일도 있겠지만, 현장이 굉장히 차분하고 여유 있다. 아까는 감독님이 화면에 담을 ‘바람을 기다린다’고 하시는데, 드라마 현장에서는 그럴 여유가 없다. (웃음) 영화는 참 낭만적이다.

-첫 촬영한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어땠나.

=첫날은 많이 낯설더라.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현장이라. 한신을 여러 테이크로 촬영하는데 왜 다시 하는 걸까? 내가 문제일까?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혼자서 별생각을 다 했다. (웃음) 그런 부분이 아직도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지만, 어제 두 번째 촬영을 하다 보니 그런 물음표에 좀 적응이 되더라. 영화 현장에서는 이게 자연스러운 호흡이구나 싶었다.

-평소 선호하는 장르의 작품이랄까, 최근작 중 인상적인 작품은 어떤 것이었나.

=취향에 맞는 영화를 골라 보기보다는 일단 많이 보자는 주의다. 느끼고 해석하고 공부하려고 영화를 많이 본다. 최근 좋았던 작품은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다.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서도 감정과 스토리를 고조시키는 지점이 좋더라. 자연스럽게 주제를 전달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밤을 걷다>가 영화로는 첫 스타트다. 독특한 멜로드라마인데.

=내 취향과 잘 맞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중 이름이 ‘지은’이어서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김종관 감독님 작품을 원래 좋아하고, 이번에 못 본 작품을 다 찾아 봤는데 감독님의 한결같은 정서가 나랑 잘 맞더라. 촬영 전 네번 정도 만나 영화 이야기뿐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인데도 관심사를 나누다 보니 감독님과 같이 있는게 어렵지 않았다. 작품에 깃든 자연스러운 느낌과 실제가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아직까지 영화 작업을 하지 않은 건 사실 의외다.

=일단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웃음)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는 두려움이 좀 컸다. 이미 벌여놓은 일들을 잘하고 싶다는 책임감도 컸고. 도전하고 싶은 확신이 드는 작품을 그동안 못 만난 것 같기도 하다.

-<페르소나>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네편의 다른 작품을 경험한다는 것, 배급 형태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 등 제작과 배급 면에서 새로운 형태라는 의미도 있는 작품이다.

=그래서 선뜻 한 것 같다. ‘영화를 한다’는 거창한 생각보다 흥미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더 와닿았다. 참여하신 감독님의 면면을 보면서 그분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즐거운 마음도 있었고. 새로운 프로젝트에 나도 함께 참여하면 재밌겠다 싶고 호기심이 생기더라.

-참여하는 감독들의 성향에 비추어볼 때, 이번에도 ‘다크’한 캐릭터가 많을 것 같다. (웃음) 가수 아이유가 아니라 ‘배우 이지은’이 가진 이미지이기도 하고, 감독들도 그런 부분을 더 파고들려 한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유로 데뷔해 10년간 활동하다 보니 그 안에 내 실제 모습, 평소 모습이 섞이지 않을 수 없더라. 아이유와 이지은의 관계가 점점 더 모호해지는 거다. 스스로 어느 정도 선에서 밝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고 마음먹어도 하다 보면 그게 항상 흐려진다. (웃음) 감독님들은 내가 무대나 예능 프로에서 주로 보여주는 그런 모습의 이면을 캐내려고 하시는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유’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 모습에 비해, 다크하고 차분한 느낌은 비교적 덜 소모된 부분이니 그걸 더 끄집어내려 하시는 것 같다.

-네편의 시나리오가 아직 다 나오지 않았는데, 함께 맞춰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 작품을 위한 미팅을 막 했다. 두려움은 있는데, (웃음) 감독님들이 나를 보고 느낀 인상을 담는 게 이 프로젝트의 취지다 보니, 내가 ‘이런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다’ 하기보다는 ‘저를 그런 식으로 보셨군요’ 하고 흥미를 더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오늘 촬영은 새벽까지 쭉 이어질 텐데.

=이 정도면 ‘꿀현장’이다. 날씨도 약간 쌀쌀한 게 서늘하고 기분이 좋다.

-작품과 직접 관계 없는 충무로 주요 감독 여럿이 오늘 현장을 참관하러 오셨다. (웃음) 배우를 향한 관심의 크기가 보이는 대목이다.

=어제는 다음 작품 찍으실 임필성 감독님이 오셔서 ‘염탐하러 오셨어요?’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웃음) 김종관 감독님도 임필성 감독님 현장에 오신다던데, 감독님이 보고 계시면 그 느낌도 이상할 것 같다.

2018.08.22

<썩지 않게 아주 오래> 촬영 현장(사진 오계옥).

● "천재야, 천재." 촬영 현장에서는 컷과 컷 사이 임필성 감독의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최근 <보금자리>(2017)로 전도연 배우와 호흡을 맞춘 임필성 감독은 그간 <남극일기>(2004), <헨젤과 그레텔>(2007) 등에서 보여준 호러, 판타지, 스릴러 등의 상황에서 배우들의 미묘한 얼굴을 포착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임필성 감독은 배우 이지은을 “차가운 감성과 뜨거운 감성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독특한 감성의 배우라고 정의한다.

-아침부터 수중촬영에 요가 장면까지 촬영 강도가 높다. 그런데도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물 공포증이 있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물에 들어가자마자 너무 무서워서 못하겠더라. 다행히 수중촬영 감독님이 이전에 한번 같이 작업한 분이고, 요가 대역 해주신 분은 실제 내 요가 선생님이라 두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번 현장은 수중촬영뿐만 아니라 내가 못하는 걸 많이 해야 했다. 운전면허증도 없는데 운전하는 신에, 흡연 안 하는데 담배 피우는 신도 있고…. 감독님이 일부러 내가 못하는 것만 골라서 넣으셨는지(웃음) 거의 챌린지다.

-그 와중에 오늘 임필성 감독님은 ‘물속에서 내면 연기를 하는 배우’라며 칭찬하기에 바빴다.

=감독님도 대단하시다. 짧은 시간에 이 신들을 다 담아낼 수 있나 싶었는데 결국 다 해내시더라.

-작품의 제목인 ‘썩지 않게 아주 오래’는 본인의 4집 수록곡 <잼잼>의 가사이기도 하다. 남녀 사이, 포장된 관계에 개의치 않는 여성의 심리를 표현하는 노래다. 먼저 제안한 건가.

=감독님과 미팅할 때 나온 이야기다. <잼잼>이란 곡은 나랑 선우정아씨랑 작업했는데, 작업하면서 원래 생각했던 테마보다 훨씬 더 친절하게 풀려서 아쉬웠다고. 그 이야기가 흥미로웠는지 <잼잼>을 엄청나게 많이 듣고 원래 있던 대본을 다시 써 오셨더라.

-공포, 스릴러 분야에서 임필성 감독이 추구하는 성향이 워낙 뚜렷하다.

=중학교 1학년 때 영화감상부 활동을 했는데, 그때 동아리 부원들과 테크노마트에 있는 극장에 가서 <헨젤과 그레텔>을 봤다. 독특한 색깔을 가진 연출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대가 컸다. (웃음) 글과 대사보다는 연출적 표현이 강렬해 이번 작품도 시나리오로 100% 이해하기는 힘들더라. 감독님께 많이 의지하고 믿고 가는 작품이다.

-판타지 호러 장르지만, 남녀의 현실적인 연애를 반영하고 있다.

=둘 다 일반적이지는 않은 독특한 커플의 연애담이다. 은은 오픈 릴레이션십을 지향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고, 정우(박해수)는 지적 허영심과 집착이 강한 남자다. 서로 그런 부분을 감추고 만나다가 하루 만에 감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런 감정의 변화가 표현되는 게 굉장히 재밌더라.

-지난번 <밤을 걷다>에서는 ‘유령’, 이번에는 남자를 응징하는 ‘마녀’ 캐릭터다. 부담이 큰 캐릭터의 연속 아닌가. (웃음)

=장편이라면 어려웠을 것 같은데 단편이라서 재밌게 신나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실험적이고 신선하다. 나는 은처럼 오픈 릴레이션십을 지향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여자가 가식적이거나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면 어떤 말투일까, 어떤 식으로 사람을 대할까 생각하며 시시각각, 컨디션에 따라 변하는 즉흥적인 심리를 최대한 담아보려 했다.

-오늘이 <썩지 않게 아주 오래>의 마지막 촬영이다. 벌써 두편을 끝냈다.

=끝났다고 끝난 게 아니라 내일부터 또 다음 작품 준비를 해야 한다. 어떤 작품을 할 때보다 부담이 크다. 특히 각각 단편이다 보니 몰입할 시간이 길지 않다. 촬영장에서는 동화되는데, 동화될 만하면 끝나버리니 그런 부분도 아쉽고. 내가 두배로 많이 노력해야 하는 작업인 것 같다.

2018.09.20

<키스가 죄> 촬영 현장(사진 백종헌).

● "내가 정말 배우복은 있구나." <소공녀>의 이솜에 이어 <키스가 죄>로 이지은과 만난 전고운 감독은 “평소 아이유가 가진 동안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역할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배우와의 막힘 없는 소통, 정치도 위계도 없이 현장에만 집중한 더없이 즐거웠던 현장. 그는 배우 이지은에 대해 “솔직하고 당당하고, 그래서 마음에 들고 반했다”고 말한다.

-내일이 <키스가 죄>의 마지막 촬영이다. 오늘은 앞서 두 작품을 촬영할 때보다 부쩍 피곤해 보인다.

=요즘 스케줄이 좀 많다. 연기 말고 가수 일(10주년 투어 콘서트 준비)로도 한창 바쁘다.

-지독한 올여름 현장을 겪었다. 이제 드디어 선선한 바람이 분다.

=이번엔 촬영 내내 비가 오는데 그것도 좋더라. 비 오는 날을 워낙 좋아해 비 오면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서울에서 촬영장(강화도)까지 오가는데 한 시간씩은 걸리는데, 바쁜 중에 그 핑계로 생각도 하고 음악도 듣고 그런다. 이번 프로젝트가 나한테 도움을 많이 준다는 생각이 든다.

-아까 현장에 들어서며 보니 멀리서도 고등학교 체육복 입은 모습이 썩 잘 어울리더라.

=일단 편해서 좋고. (웃음) 체육복이 예뻐서 피팅할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한나가 누룽지를 가방에 매달고 다니는데 그런 설정도 너무 재밌더라.

-고등학생 역할을 하는데 위화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나이 어린 역할을 한다는 게 크게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나이를 떠나 한 캐릭터를 맡을 때마다 늘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하는 건 같다고 본다. 다른 인생을 표현한다는 사실이 도전이지, 역할의 나이는 그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키스가 죄>는 전고운 감독이 겪은 일화에서 발전시킨 이야기라고 하니 그만큼 현실적인 캐릭터로 보인다.

=새벽에 초고를 받았는데, 읽자마자 대박! 그랬다. (웃음) 한나와 혜복(심달기)이 처한 상황이 가벼운 상황은 아닌데, 이걸 그 또래만의 감성으로, 또 그 시기에만 나오는 에너지로 풀어낸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그 상황을 극복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여서 재밌다.

-한나는 단짝 친구 혜복이 처한 폭력적인 상황을 눈감지 않고 끌어가는 적극적인 캐릭터다.

=감독님이 ‘한나’를 화나, 화나 해서 한나라고 지었다고 하더라. (웃음) 내가 화가 많지 않은 성격이라 계속 화를 더 내라고 하시는데 그게 너무 어렵더라. 초반에 그래서 고생을 좀 했다.

-끌어나가는 역할이라 어투나 톤도 지금까지 보여준 연기와 다를 것 같다.

=이런 경우가 처음인데, 든든한 역할을 맡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체구가 좀 작은 편이고, 기본적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이미지도 아니고, 몸을 잘 쓰는 편도 아니라서.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는 역할이라 그 점이 신선했다. 보호하는 것이 습관인 사람의 말투나 행동을 많이 생각했다.

-혜복아! 혜복아! 하고 부르는 장면을 봤는데, 목소리가 우렁차더라. (웃음)

=(웃음) 그게 되게 자연스럽게 되더라. 혜복이 얼굴을 보니까 사랑스러워 보이고, 지금 상황에 화가 나더라. 찍는 동안 몰입돼서 이 모든 환경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전고운 감독 전작 <소공녀>(2017)가 청년시대, 여성이 겪는 현실이라는 화두를 던졌다면, 이 작품 역시 가부장적 사회, 폭력에 저항하는 10대 소녀들의 서사를, 여성감독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특화되는 부분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작품을 통틀어 여성감독과 작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감독님 개인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확실히 편한 지점이 많았다. 결단력 있는 가운데 세심하게 공감해주셔서 촬영하는 내내 마음이 편했다.

-<페르소나> 촬영 소식이 얼마 전 기사화되며 이지은의 영화계 데뷔를 알렸다. 실감하나.

=영화 한다며? 하는 지인들 문자메시지가 쇄도했다. (웃음) 어쨌든 내 필모그래피에서 첫 영화 프로젝트라 마음가짐이 전과 많이 달랐다. 그런데 겪어보니 여기도 다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현장이더라. 마음이 점점 편해지고 있다. (웃음)

2018.09.29

<러브 세트> 촬영 현장(사진 백종헌).

● "클로즈업 안에 여러 드라마를 담고 있다." <미쓰 홍당무>의 공효진, <비밀은 없다>의 손예진 등 전형적인 여성성을 걷어낸 인물의 민낯을 보여준 이경미 감독은 현장에서 만난 배우 이지은을 ‘놀라운 연기자’라고 정의한다. 대사 없이 표정만으로도 사연이 읽히는 인물. 그래서 더 많은 작품에서 그녀의 연기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오늘이 제일 블록버스터급 현장 같다. 스탭도 많고, 액션 장면의 연속이다.

=사람도 많고 찍을 것도 많고 난이도 높은 신도 많다.

-이 프로젝트 초반부터 이번 현장에서 보여줄 테니스 연습을 가장 난관으로 꼽지 않았나.

=연습을 진짜 많이 했는데, 그에 비해 도통 늘지 않아서 답답하고 속상했다. 배두나 선배님과 한번 같이 연습했는데 실력 차이가 너무 나서 걱정도 되고. 이게 왜 안 되지 답답했다. 그런 조급함이나 속상함이 캐릭터에 묻어날 수 있는 작품이라 이 마음을 녹이면 좋을 것 같은데. (웃음) 그래도 여기 와서 치니까 훨씬 나아졌다.

-실전형인 것 같다. (웃음) 그만큼 과제가 많은 작품이다.

=몸이 너무 힘들어서 꾀를 좀 부릴까 하다가도 안 되겠다 싶더라. 이런 마음이 든 게 아주 오랜만이다. 그제 첫 촬영을 하는데 테니스 동작도 동작인데, 엄청 많이 넘어지는 역할이다. 넘어지는 근육은 또 다르니까 그게 다 근육통으로 온 거다. 촬영 끝나고 집에 가서 뻗었다가 새벽에 너무 아파서 울면서 일어났다. 너무 서럽더라. 최근에 앨범 준비까지 같이 하느라 스케줄이 많았는데, 그게 한꺼번에 몸으로 온 거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 놀란 게, 그래도 연습하러 나가야지 하고 가게 되더라. (웃음) 알게 모르게 이 프로젝트에 애착이 크고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구나 싶었다. 다행히 오늘은 가뿐하다. 근육통은 원래 운동으로 풀어야 하니까.

-현장에 대한 애착이 부쩍 강해진 것 같다.

=찍은 컷들을 나중에 보는데,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기더라. 욕심이 생겼다. 네편 중 이번 작품 현장이 제일 독특하다는 생각도 들고.

-독특한 현장, 어떤 걸 말하는 건가.

=이경미 감독님 영화는 미장센을 비롯해 영화가 되게 치밀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와보니 제일 유동적인 현장이다. 그게 나를 좀 많이 움직이게 하고, 자극이 되더라. 컷마다 디렉션을 다르게 주셔서 거기 맞춰서 하다 보니, 아 그럼 이렇게 해봐야겠다 하고 자꾸 내가 나를 움직이게 되더라. 원래 그런 걸 되게 힘들어하는 편인데, 이 현장에서는 의욕이 많이 생긴다.

-이경미 감독의 캐릭터 관계도를 보면 여성이 적대관계인 것 같다가, 어떤 사건을 거쳐 이해관계를 형성한다. 짧은 단편이지만, 이번에도 압축적으로 그 변화가 엿보인다.

=지은은 아빠(김태훈)에 대한 소유욕도 있지만, 영어 선생님(배두나)에 대한 소유욕도 가진 캐릭터다. 애착이 큰 캐릭터고 그 심리가 테니스 코트에서 드러난다. 이 경우 적대시하는 감정선이 아니라 심술궂기도 하고 복잡미묘하다.

-테니스공을 던지며, 영화계 대선배인 배두나 배우의 연기 공력을 ‘받아쳐야’ 하는 연기다.

=선배님께 많이 반했다. 직접 말씀은 못 드렸지만 이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되실 텐데, 아마 끝날 때까지 ‘반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진 못할 것 같다. (웃음) 연기도 놀랍고, 현장에서 늘 배려하고 챙겨주셔서 그 부분도 너무 감사하다.

-이제 촬영 막바지다. 아이유의 10년을 정리하는 기념작으로도 의미가 있다.

=내가 원래 여름에 능률이 떨어지는데, 데뷔하고 10년간 여름을 이렇게 열심히 산 적이 없었다. 이 프로젝트 시작하면서, 마침 데뷔 10주년이고, 한 사람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습을 다각도에서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는데, 그 마음이 이 작품에 잘 표현된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한편으로는 시나리오가 모두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한편 한편 받아보는 데서 오는 긴장감도 있었을 것 같은데, 잘 통과했다.

=초반에는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보통은 시나리오를 받고, 그다음에 결정하는데, 이건 ‘이 프로젝트를 합시다’ 하고 작품이 결정되는 순서라 만약, 그때 이 글은 절대 못할 것 같으면 어떡하지 싶었다. 작품으로 나를 보여주는 건데,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니까. 그래서 감독님들께 매번 솔직히 말씀드렸다. ‘이건 못하겠습니다.’ ‘여기선 이렇게 가면 더 잘할 것 같습니다.’ 감독님들이 이런 내 의견에 열려 있었고, 좋은 작품을 만들자는 생각은 같았다.

-창작자들에게는 이 작품이 ‘배우 아이유’에 대한 일종의 샘플링이 될 텐데.

=기사 나간 후 요즘 좋은 글을 많이 보내주셔서 열심히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재밌는 걸 왜 나한테 주시지 싶기도 하고. (웃음)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놀랍다. 이전에는 영화를 한다는 데 대해 부담이 무척 컸다. 영화가 가지는 무게감이 아무래도 다르고, 내가 비중 있는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 자체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작품으로 영화 현장은 이렇구나 하고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아 이제는 장편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성배우의 롤이 한정적인데, 한 사람의 배우로 이 분위기를 환기하고 싶다는 다짐과 목표도 생겼을 것 같다.

=10년간 활동하고 이런저런 평가를 받으면서 느낀 건, 내 논리가 분명하면 어떤 평가를 받아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걸 했다가 평가가 갈리면 힘들고 지치더라. 음악이든 연기든, 예능 프로든 내 이미지가 어떻게 분류될지 크게 따지지 않고 활동해왔다. 그순간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과 맞는다면 그때그때마다 가리지 않고 해왔다. 영화 역시 이런 배우가 되어야지,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감각적으로 할 수 있겠다 싶고, 하고 싶은 끌림이 있는 배역이라면 도전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아이유라는 배우가 이 역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글을 보내주시고, 제가 그 글을 읽었을 때 할 수 있겠다고 판단이 서는 작품은 기꺼이 도전하고 싶다.

-모두 경험한 시점이니, 네편의 작품 중 배우로서 자신의 성향에 가장 잘 맞는 작품은.

=감독님들이 이 인터뷰를 보실 텐데, 한편을 꼽기가. (웃음) 나는 평화주의자라, 다 좋았다. 워낙 처음부터 참여하고 함께 만든 작품이라서 기본적으로 내가 싫어할 수 있는 작품은 아예 없다. (웃음)

-오늘 촬영도 곧 끝난다.

=해 지면 못 찍어서 오후 6시면 끝날 것 같다. 매번 현장에 오시고, 관심 가져주셔서 고맙다. 곧 또 다른 현장에서 뵙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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