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나쁘게 끝날 거야.”(This is gonna end badly) 제72회 칸영화제 개막작 <데드 돈 다이>에서 애덤 드라이버가 연기하는 경찰 로니가 반복하는 대사다. 영화제 첫날 팔레 드 페스티벌에서 <데드 돈 다이>를 관람한 세계 각국의 기자들은 애덤 드라이버의 이 말이 올해 칸이 맞이할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언은 아니냐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확실히 영화제가 열리는 크루아제트 거리 일대는 예년에 비해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해변가를 따라 늘어선 빌라에 빼곡히 걸려 있던 각종 영화사 배너와 영화 광고, 현수막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마켓에서 만난 한국 영화인들은 거래 관계에 있던 해외 바이어들이 올해 칸에 불참하거나 라인업을 줄인 경우가 적지 않다며 우려를 표했다. <버라이어티>는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 기업들이 전통적인 극장 개봉을 포기하고, 예년 같았으면 <HBO>나 <쇼타임> 등의 방송사가 선점했을 소규모 극장 상영 배급권을 빼앗는 이 시대에 과거의 방식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며 면 대 면으로 만나 영화를 사고팔며 홍보하고 배급을 논의했던 영화산업의 생태계가 변화의 국면을 맞이했으며, 이러한 변화가 칸영화제 마켓의 풍경도 바꿔놓고 있다고 전했다. 더 적은 스타, 더 적은 파티, 더 적은 규모의 마켓은 칸영화제의 운명에 먹구름을 드리울까?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적어도 극장 안에서만큼, 이야기가 좋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업그레이드된 B급영화”들의 화제몰이
영화제가 중반을 넘어선 5월 22일 현재, 칸영화제의 메인 상영관이 위치한 팔레 드 페스티벌에서는 경쟁부문 초청작 21편 중 14편의 영화가 공개됐다. 올해의 경쟁부문 라인업은 켄 로치, 다르덴 형제, 페드로 알모도바르, 테렌스 맬릭 등 칸영화제의 단골 손님이었던 거장 감독들과 마티 디옵, 라즈 리,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등 경쟁부문에 새롭게 진입한 젊은 감독들의 경합으로 화제가 됐다. 지금까지의 작품을 돌아보건대 이러한 칸의 선택은 경쟁부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황금종려상을 둘러싼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거장 감독들은 자신의 근작을 넘어서는 영화를 들고 칸을 찾았으며, 신진 감독들은 세계가 왜 그들을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영화를 통해 분명하게 보여줬다. 황금종려상을 타야 할 명분이 있는 작품들이 적지 않으며, 수상권에서 멀어진 듯 보이는 영화조차 별점 폭탄과 야유 세례를 받은 작품은 없다.
지금까지 경쟁부문 상영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경향은 장르영화의 공세다. 좀비와 유령, 갱스터와 폭도, 살인마들이 배회하는 올해 경쟁부문의 영화들은 예년의 라인업에 비해 장르적인 색채가 짙다. 특히 개막작 <데드 돈 다이>와 브라질 감독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의 신작 <바쿠라우>, 세네갈계 프랑스 감독 마티 디옵의 <아틀란티크>가 상영된 영화제의 첫 3일은 마치 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영화가 장르의 틀 안에서 일제히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리포트(<씨네21> 1206호 기획 기사)에 자세히 소개한 짐 자무시의 <데드 돈 다이>는 기후변화로 무덤에서 깨어난 죽은 자들과 이미 여러 차례 불길한 전조가 있었음에도 지극히 순응적인 태도로 다가오는 종말을 맞이하는, 좀비와 다를 바 없는 산 자들의 모습을 조명한 좀비영화였다. 경쟁부문 상영작 중 가장 유혈이 낭자한 브라질영화 <바쿠라우>는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는 위협에 직면한 변두리 마을 사람들을 통해 브라질의 현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다. 또 마티 디옵의 <아틀란티크>에 출현하는 유령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바다로 나갔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수많은 난민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는 “업그레이드된 B급영화”같은 올해의 상영작들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부당한 일들을 은유적이고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며 환영적이면서 균열적인 이야기를 통해 군중의 거센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장르영화 중 칸에서 가장 열띤 반응을 얻고 있는 작품은 마티 디옵의 <아틀란티크>다(5월 22일 현재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하이프의 바통을 이어받았다.-편집자). 경쟁부문에 초청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여성감독이라는 점으로도 화제가 된 마티 디옵은 자신의 첫 장편영화인 이 작품을 통해 세네갈의 참담한 현실을 몽환적이면서도 시적인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 사는 여성 아다는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건설 노동자 슐레이만을 사랑한다. 몇달째 월급을 받지 못한 슐레이만은 아다를 만나기로 한 날 밤, 더 나은 삶을 찾아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떠났다가 바다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상심한 아다는 부모의 바람대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지만 그의 결혼식날 신혼집 침대가 불타고 경찰은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슐레이만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 아다는 정체불명의 발신자로부터 슐레이만이라며 만남을 청하는 문자를 받는다. <아틀란티크>는 멜로 장르에 미스터리 수사물과 판타지 장르의 특성을 결합한 영화다. 아프리카 난민을 조명한 대다수의 영화들이 간과한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난민 이슈의 주체가 되지 못한 아프리카 여성들의 몸을 통해 더욱 풍성한 논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은 이 작품의 탁월한 성취다. <아틀란티크>에서 여성의 몸은 구천을 떠도는 남성 난민들의 영혼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여성 스스로의 욕망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복합적인 존재다. 프랑스 일간지 <20 Mins>는 <아틀란티크>가 “영화의 주제를 신화적이고 판타스틱한 방법으로 정교하게 다루어내는, 흔치 않은 진주 같은 작품”이라며 이 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전했다. 올해 경쟁부문 라인업을 수놓은 장르영화의 반대편에는 좀더 현실적인 필치로 세계의 현재를 근심하는 일련의 리얼리즘 영화들이 있다. 유럽의 두 거장, 켄 로치의 <소리 위 미스드 유>와 다르덴 형제의 <영 아메드>가 그런 작품일 것이다. 먼저 켄 로치 영화는 최근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고용 형태인 ‘긱 경제’(필요에 따라 사람을 구해 임시로 계약을 맺고 일을 맡기는 고용 형태)의 딜레마를 이야기한다. 건설 현장의 노동자였으나 해고된 가장 리키는 택배회사의 계약직 직원으로 고용돼 운송 업무를 시작한다. 첫 출근날, 동료는 그의 손에 빈 페트병을 쥐어주며 소변이 급할 때 사용하라고 말한다. 프리랜서 택배기사로 일하며 리키가 잃게 된 건 화장실에 갈 시간뿐만이 아니다. 빚을 내 택배를 운송할 밴을 구입하는 바람에 사회복지사인 리키의 아내는 매일 고된 출근길을 감내해야 하고,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삶은 황폐해진다. 제69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켄 로치의 전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보다 <소리 위 미스드 유>의 정서적 여파가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 영화가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사회 시스템의 딜레마를 폭로하는 데에서 나아가 개인의 고단함이 어떻게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는지까지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인 ‘미안해요, 우리가 놓쳤어요’는 물품이 제대로 배송되지 않았을 경우 작성해야 하는 택배업체의 서식 제목이다. 켄 로치의 영화적 동지인 폴 래버티의 사려 깊은 시나리오는 우리가 놓쳐버린 것이 과연 택배뿐일지 관객에게 되묻는다.
한편 다르덴 형제의 <영 아메드>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빠진 벨기에의 10대 소년 아메드가 주인공이다. 게임이 주요 관심사였던 평범한 소년 아메드는 극단주의적 성향을 가진 이맘(이슬람교 교단의 지도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여성과 다른 인종을 적으로 돌린다. 그는 유대인 남자친구를 둔 아랍어 선생님 이네스가 신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해 암살을 계획하지만 실패한 뒤 소년원에 수감된다. 영화는 소년원에 들어가서도 호시탐탐 선생님을 해칠 계획을 세우는 아메드의 모습을 좇는다. 다른 신념과 생각을 가진 이들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길이라 굳게 믿는 사춘기 소년의 행보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 불허다. 이 영화는 주로 유럽 백인 노동자 계층의 문제에 주목해온 다르덴 형제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커뮤니티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변화로도 읽힌다. 그러나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영화는 극단주의에 빠진 한 소년의 현재적 상태에 주목할 뿐 그와 사회의 연결고리를 탐구하거나 좀더 거리감을 좁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황금종려상 받을까
22일 현재 칸영화제 공식 데일리지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있는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다. 이 작품은 영미권 공식 데일리 <스크린>과 프랑스권 공식 데일리 <르필름 프랑세즈>의 평점 지면에서 공동 선두를 달리며 황금종려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지목되고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버전의 <8과 1/2>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이 영화는 알모도바르의 오랜 협업자 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내세워 노년에 접어든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반데라스가 연기하는 살바도르 말로(알모도바르의 철자를 모두 담고 있는 이름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는 유명 영화감독이다. 그는 오랫동안 업계에서 존경받는 영광을 누려왔지만 이제 병들고 지쳤다. 영화를 만들지 않고는 살 수 없으나 창작에 대한 열망이 더이상 타오르지 않는 그는 30여년 만에 재회한 동료 배우가 건네준 마약에 중독되고 만다. 약에 취한 상태에서 그는 동굴집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생명력이 넘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첫사랑의 추억과 성에 눈뜬 순간으로 자꾸만 돌아간다. 삶의 고통스러운 순간, 가장 빛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살바도르 말로의 모습은 기나긴 내면의 투쟁을 거쳐 마침내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 영화감독 알모도바르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버라이어티>는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보다 급진적인 게 어디 있을까?”라고 말하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화려한 프로덕션 디자인과 급진적인 소재를 배제하고 최대한 꾸밈없는 모습으로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장의 결단에 경의를 표했다.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사적인 경험이 <페인 앤 글로리>에 얼마간 반영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작품이 그의 자전적 영화는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처럼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가늠할 수 없게 하는 알모도바르의 스토리 직조 능력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픽션, 이야기 속 이야기를 경유하다보면 마법과도 같은 엔딩 신이 기다리고 있다. <페인 앤 글로리>는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사랑과 예술가로서의 자기 고백을 울림 있게 담아내는 영화다. 황금종려상이 이 작품에게로 향한다면, 수상을 알리는 기사의 제목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고통과 영광’보다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은 없겠다.
지금까지 언급한 작품들이 영화제 중반까지의 분위기를 주도한 영화라면, 주말을 거치며 프랑스 여성감독 셀린 시아마의 <포트레이트 오브 어 레이디 온 파이어>와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의 또 다른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이어지는 지면에서는 <기생충>에 대한 더 자세한 소식을 전한다. 셀린 시아마,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다음주 결산 기사에서 그들의 인터뷰와 함께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다시 한번, 로니가 틀렸다. 이야기는 나쁘게 흘러가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