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시빌>은 창작욕에 불타던 한 여자가 글의 소재로 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다가 오히려 자신의 어두운 과거와 대면하게 되는 이야기다. 심리치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려는 시빌(버지니아 에피라)은 자신을 찾아온 환자 마고(아델 엑사르코풀로스)에게서 깊은 영감을 받는다. 시빌은 치료의 목적을 넘어 마고의 삶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관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영화는 다층적인 액자 구성의 이야기를 통해 독특하고 이상한 심리 스릴러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올해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쥐스틴 트리에 감독을 만나 이 영화의 독특한 세계와 구조에 대해 물었다.
-처음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서 시작한 영화는 아니다. 본능적으로 어떤 일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여성의 초상화를 그려보면 어떨까, 라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다. 내가 가진 성향, 내가 하는 연구, 좋아하는 영화 등에서 재료를 만들어 종합한 이야기다.
-주인공 시빌은 소설 집필에 굉장한 열의를 가진 인물이다. 캐릭터를 만들 때 감독 자신과 닮은 점을 심어놓거나 혹은 분신처럼 만들어낸 캐릭터는 아닌가.
=시빌과 내가 닮은 점이 있냐고? 나는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는 어떨지 모르겠다. (웃음) 사실 시빌의 캐릭터를 고민할 때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가 한편 있다. 우디 앨런의 <또 다른 여인>(1988)이다. 그리고 히치콕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클로드 샤브롤 감독도 내 영감의 원천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창작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환자에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는 정신과 의사 시빌이 영화 촬영장에서 배우의 예술혼을 전부 끄집어내려 노력하는 감독과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의 존재가 묘하게 닮아 있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시빌은 모든 규칙을 어기는 데서 오는 쾌감을 좋아한다. 그녀는 어떤 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현실을 떠나 허구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한다. 물론 시빌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 그건 그만큼 그녀의 현실이 별 볼 일 없다는 뜻이다.
-아이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장면을 지속적으로 삽입한 것은 어쨌든 다음 세대를 위한 책임감에 대한 고민을 담기 위한 것이었나.
=이 영화에서 아이들은 그림자처럼 곳곳에 숨어 있다. 정신분석 상담을 받는 아이 다니엘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인다. 이야기의 맥락에서 꼭 등장하지 않아도 될 때 나온다. 마치 유령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주변에서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고 모니터링해줄 때에도 다니엘은 꼭 들어가야 하는 캐릭터였다. 왜냐하면 시빌의 마지막 결정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시빌 역의 버지니아 에피라 외에도 마고 역의 아델 엑사르코풀로스, 미카 역의 산드라 휠러 등이 보여주는 멋진 연기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만 해도 마고는 그저 나이 많은 여배우가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오디션장에 아델이 나타났다. 나는 그녀의 우아한 매력을 보자마자 시나리오를 그녀에 맞춰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산드라 휠러는 오래전 독일에서 연극배우 활동을 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다. 그녀의 진지하면서도 즉흥적인 연기는 매번 나를 감동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