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생충> 비평②] 봉준호의 영화들에서 보여진 여성 이미지 재현의 문제에 대하여 <기생충>을 중심으로
2019-06-20
글 : 손희정 (문화평론가)
그 디테일, 괜찮습니까?

봉준호는 장르의 변주 안에서 한국적 특수성을 탐색하는 감독으로 이름 높다. 그가 <설국열차>(2013)와 <옥자>(2017)라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지나 다시 <기생충>을 내놓았을 때, 관객은 봉준호의 ‘한국으로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이름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봉준호 장르의 독특함이란 이처럼 보편성과 특수성뿐만 아니라, 사건과 일상, 공포와 우스꽝스러움, 완벽한 통제와 ‘삑사리’ 등 서로 모순되는 듯 보이는 것들이 공존하고 부딪히면서 만들어내는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이 아이러니는 봉준호 장르가 한국 사회의 구조에 접근하는 서사적 전략이다. 봉준호는 한 대담에서 극영화가 구조를 다루는 방식은 사회과학서적처럼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비롯되는 “재앙들이 개인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으로 전이되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기생충>의 저 유명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처럼 구조를 시각적으로 구상(具象)할 때에도, 구조의 피해자들은 그 시스템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간극 자체, 즉 관객의 눈에는 생생하게 드러나는 구조가 스크린 속 인물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야말로 봉준호 장르의 가장 날카로운 아이러니다.

여기에서 봉준호 장르의 두 번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우화로서의 영화’가 등장한다. 구조가 다양한 영화언어를 통해 형상화되기 때문에 영화는 비사실주의적인 우화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덕분에 봉준호 영화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것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영화는 ‘리얼리즘’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그렇다면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우화들이 어떻게 지금/여기의 특수성을 ‘정확하게’ 포착했다는 감각을 주느냐다. 이는 바로 봉준호식 디테일을 통해서다. 예컨대 <기생충>의 기택(송강호) 가족이 마시는 필라이트 맥주와 근세(박명훈)를 망하게 한 대만 카스테라 사업 같은 설정들 말이다. 그러므로 ‘봉준호의 귀환’에 있어 핵심은 바로 이런 한국적 특수성을 만들어주는 디테일의 귀환이다.

더불어서 영화가 무언가 다른 메시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적 느낌’은 관객의 적극적 해석을 불러온다. 이때 수많은 디테일이야말로 해석 유희의 장이 된다. 예를 들면 <기생충>의 짜파구리의 경우. 한 관객은 ‘한우 짜파구리’에 대해서 “짜파게티와 너구리로 대변되는 두 빈곤층과 한우로 대변되는 한 상류층이 ‘한 접시=하나의 집’에 공존하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분석했다. 정말 그러한가? 짜파구리는 캠핑 예능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 이후의 한국 사회를 묘사하는 디테일인가, 한 지붕 세 가족에 대한 수사(修辭)적 계산인가. 사실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관객의 해석 실천과 온라인을 타고 흐르는 유희의 상호작용이 이 작품을 2019년의 사건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테일은 그의 작가성을 확인시켜주고 대중성을 보장해주는 이중의 장치가 된다. 하지만 온통 디테일만 주목받는 해석 놀이들을 구경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렇게도 중요한 디테일, 과연 괜찮을까?

<살인의 추억>과 여성 신체의 문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계를 감아 2003년으로 잠시 돌아가보자. 그해에 박찬욱의 <올드보이>, 장준환의 <지구를 지켜라!>, 김지운의 <장화, 홍련> 그리고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이 개봉했다. 홍상수, 김기덕 같은 감독들이 그 이름을 각인시키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그렇게 1990년대 신르네상스기의 작품 경향을 뒤집어엎고 한국영화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해가 2003년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한국(상업)영화가 여전히 “2003 유니버스에 갇혀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시대를 열었던 <살인의 추억>은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정교한 영화언어가 비판적인 역사 인식을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는 웰메이드 장르영화의 등장. 한편으로 영화는 여성 신체를 관음하면서 난자치고, 살인자에게 카메라의 시점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하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그 역사에 책임이 있다”는 ‘위험한’ 깨달음 대신, 폭력의 쾌락을 느끼는 ‘안전한’ 자리로 관객을 초대했다는 비평적 의심을 불러왔던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심에 대한 답은 이후 15년간 한국영화 스크린에서 펼쳐진 여자 시체의 향연 위로 선연히 드러났다. 여성 신체에 대한 착취는 확실히 한국영화의 쾌락을 구성했다.

시대를 선도한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이후 펼쳐진 한국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봉준호의 영화가 한국 사회의 어떤 관습적인 상상력과 쉽게 조응하고 있는지는 질문해보아야 한다.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 <마더>(2009)에서 옥상에 널려 있던 문아정(문희라)의 시체는 어쩐지 잊히지 않는다. 쌀을 벌기 위해 몸을 팔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쌀을 빌미로 자신을 ‘탐하는’ 남자들을 증오했던 한 소녀는 왜 축 늘어진 채로 모두가 보라는 듯이 달동네 옥상에 전시되었는가.

물론 여자가 시체가 된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봉준호에게 여성에 대한 폭력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모순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한 장치였다. 오직 폭력의 스펙터클을 목표로 하는 것과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폭력을 묘사하는 것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도준(원빈)이 “문아정이 얘 지금 피 질질 흘리고 있으니까, 빨리 병원에 데려가라고, 사람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았다”고 말하는 것은 징후적이다. 이 남성 작가는 여자의 삶과 몸에 구조의 폭력을 새기고, 그것이 누구에게나 잘 보이도록 스크린 위에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해냈다. 그리고 관객에게 “얼른 병원으로 가자”고 요청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는 <마더> 이후 치료책-대안을 상상하기 위해 노력했다. <설국열차>에서는 혁명을, <옥자>에서는 구체적인 타격점을 설정하고 저항의 연대를 꿈꿨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문아정은 누가 죽였을까? 바보라는 소리를 참지 못했던 도준 자신이었다. 그리고 구조의 폭력을 매춘이나 강간과 같은 성적 메타포를 경유해서 재현하기로 결심한 감독 자신이었다. 그리하여 이 서글픈 장면에서 과연 관객은 무엇을 보았을까? 문아정의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쌀떡 소녀’의 짧은 치마 아래로 늘어진 다리였을까.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여전히 어떤 감독들이 여자를 살덩어리 취급하는 것에서 작가성을 봐주기를 원할 때, 봉준호는 <옥자>와 함께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시스템에 저항하는 옥자-미자 연대체를 탄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다시 아버지-아들의 이야기로 회귀한 <기생충>을 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글로벌 자본과의 협업 안에서 등장한 보편적 서사로서 소녀 영웅의 이야기는 “봉준호의 귀환”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살인의 추억>

봉준호 장르의 젠더 배치와 디테일

봉준호 장르와 젠더 문제를 생각할 때 <마더>는 확실히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괴물>의 ‘한강의 기적’이라는 특수성에서 <설국열차>의 ‘세계의 멸망’이라는 보편성으로 점핑하기 직전, 봉준호는 <마더>라는 아주 은밀한 이야기로 시선을 옮겼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2006)에서 여성을 ‘편재하는 희생자’, ‘부재하는 어머니’, ‘사라지는 매개’로 축소시켰던 것을 반성적으로 회고하듯, 봉준호는 ‘국민 어머니’ 김혜자와 함께 한국 사회가 구축해온 어머니의 도상을 뒤집는다. 그러나 ‘위대한 어머니’와 ‘기괴한 어머니’는 모성 신화의 야누스적 두 얼굴일 뿐이다. 덕분에 마더(김혜자)의 이야기는 신비화된 모성 담론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봉준호의 남자들이 한국 역사로부터 등장한 재앙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것과 달리 마더의 고난은 개인적 상황 이상의 맥락을 가지지 않는다. 봉준호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는 언제나 구조와 역사를 말하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는 원초적인 이미지에 머물면서 탈역사화되는 것이다. 봉준호 장르의 더 근본적인 문제란 이런 젠더 배치 안에서 등장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괴물>에서 어머니-괴물의 등장을 보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아직 아버지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딸 현서(고아성)를 빼앗겼던 아버지-워너비 강두(송강호)가 괴물에게 쇠막대기를 꽂아넣자, 질의 형상을 한 ‘그것’의 입에서 현서와 세주(이동호)가 튀어나온다. 이는 명백히 출산 장면으로 의도되었다. 세주는 괴물을 처단함으로써 비로소 아버지가 된 강두와 어머니-괴물이 함께 재생산한 차세대-아들인 셈이다. 그런데 강두의 경우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축적되는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되어가는 것과 달리 괴물은 ‘쇠막대기와 구멍의 만남’이라는 성적 메타포 뒤에 이어지는 출산 이미지를 통해서 바로 어머니로 승인된다. 심지어 이제까지 그 성별이 질문에 부쳐지지 않았던 그것은 이 장면에 와서야 선명하게 암컷으로 이해되어버린다. 의미의 연쇄 속에서 출산이라는 문화적 행위가 여성성의 본질로 환원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한 인터뷰의 내용처럼 봉준호가 모든 구멍을 질로 상상하고 모든 길고 단단한 것을 음경으로 상상한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토록 구조와 역사에 천착하는 감독이 성적 메타포를 경유해서 ‘여성’과 ‘여성적인 것’만을 역사의 외부로 추방하여 자연화한다면, 그것은 문제적이다. <기생충>에서 영화의 끝에 여성 인물들의 활기가 설득력 없이 급하게 소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봉준호 장르에서 역사란 곧 남자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그렇게 구조에 대한 비판은 ‘효자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제 디테일로 돌아가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그리고 있는 “1980년대의 야만”이 기실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과 함께 날조된 것임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봉준호가 참조하고 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비롯한 여성 대상 범죄는 명백하게 가부장제라는 구조로부터 비롯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영화는 여성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의 맥락, 즉 여성혐오 문화를 삭제한다. 그리고 그렇게 텅 빈 여성 시체에 ‘독재하의 엄혹한 1980년대’라는 다른 역사적 맥락을 채워넣는다. 이 과정에서 실존했던 살인사건은 본래 놓여 있던 맥락을 벗어나 적극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설정으로 산화되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남자들의 이야기만 실체를 가지게 된다. 이 왜곡된 남성 무용담이 ‘리얼리즘’이자 ‘작가영화’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드라마 <수사반장> 클립과 같은 아주 치밀하게 설치된 디테일을 통해서다. 마치 <기생충>이 양극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난을 대상화한다고 비판받을 때에도 필라이트라는 디테일만은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말이다. 어찌 보면 가난의 대상화에 대한 비판은 봉준호식 디테일이 초래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관객이 ‘봉테일’(봉준호식 디테일과 그 안에 깔린 감독의 의중)을 해석하고 그것을 전시하느라 바빠서, 정작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구조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사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봉준호식 디테일은 전혀 괜찮지 않다. 그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디테일이라는 위대함이 뭉개버리기 때문이다.

모멸의 미학화

<기생충>에서 디테일의 힘 덕분에 진실의 자리에 올라선 것은 무력감과 모멸감이다. 물론 이 모멸의 정조는 천재 봉준호가 갑자기 포착해낸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의 전조에는 구조와 싸울 수 없으므로 스스로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하녀>(2010)의 은이(전도연)와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 대 병의 싸움에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4)의 수남(이정현)이 있었다. 이 사이에서 호기롭게 남궁민수(송강호)의 혁명을 말했던 봉준호는 먼 길을 돌아 좌절의 헬조선으로 귀환했다. 이야말로 한국에 대한 정확한 이해라는 듯이 모멸을 전시하면서.

그리하여 고급 저택의 지하실을 차지하기 위해 을과 병이 뒤섞여 투쟁하는 이 아이러니의 장에서 우리는 새로운 한국영화의 특수성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폭력의 미학화를 거쳐 우리 앞에 등장한 무기력과 모멸의 미학화. 이제 이것이 비평의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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