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생충> 비평⑥] 김기영, 클로드 샤브롤,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와 <기생충> 함께 보기
2019-06-20
글 : 김소미
걸작들을 향한, 봉준호의 도발적 대답
<하녀>

창작자로서 봉준호는 언제나 영감의 출처를 밝히길 주저하지 않는,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열렬한 영화광이며 동료들의 애호가다. <기생충>이 장르영화의 최전선에 우뚝 서기까지, 오마주와 창조적 변주, 그리고 무의식적인 측면을 포함해 감독의 지하실에서 어떤 영화적 유령들이 배회했을지 궁금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그동안 여러 자리에서 <하녀>(1960)를 만든 한국영화의 독보적인 ‘변태’ 김기영 감독에 대한 존경과 상찬을 밝혀왔다. 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할 당시엔 연단에 올라 프랑스 감독 앙리 조르주 클루조와 함께 클로드 샤브롤을 언급했다. 일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에 관해서는, 이미 네번의 대담을 나눈 적 있는 친밀한 대화 상대이며 서로를 현존하는 감독들 중 가장 좋아한다고 밝히는 영화의 솔메이트라고 불러도 좋겠다. 김기영, 클로드 샤브롤, 구로사와 기요시를 중심으로 <기생충>과 나란히 보면 좋을 5편의 영화를 추렸다.

김기영의 <하녀> <충녀> <육식동물>

봉준호는 김기영의 계단을 밟아 상상력의 문을 연다. 기괴하거나 엉뚱하거나 희화화된 인물들이 예정된 파국을 향해 나아가면서, ‘엇박자’, ‘삑사리’, ‘변태적’ 호흡을 만들어내는 봉준호 영화의 불균질함은 <죽엄의 상자>(1955)로 데뷔한 한국영화의 독보적 스타일리스트 김기영의 정신을 배제하고 말하기 어렵다. 김기영 감독이 호러와 멜로드라마 장르 위에서 컬트영화의 제왕으로 군림했다면, 봉준호 감독은 범죄, 코미디, SF에 이르기까지 장르영화의 갖가지 문법을 조합하고 비틀어 이제 ‘봉준호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성취했다고 평가받는다. 우선 <기생충>을 통해 최초로 접속되는 영화는 <하녀>다. 부유한 집안의 우아한 구조물이자 관객을 예기치 못한 자리로 데려다놓는 박 사장(이선균)네의 여러 계단 덕분이다. <하녀>에서 방직공장의 음악부 선생 동식(김진규)과 아내(주증녀)는 최신식으로 개조한 이층 양옥집으로 이사한 뒤, 새로운 식모(이은심)와 만난다. 근대로의 이행, 신분 상승의 욕망을 고스란히 떠안은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 입성한 농촌 출신의 하녀는 즉각 에로틱한 공생의 방식을 제안한다. 아래층에선 부지런한 아내가 미싱을 돌리고 위층에선 하녀가 임신 사실을 알리는 가운데, 위태로운 남성은 하녀와 함께 점점 더 공포스러운 추락의 상황에 내몰린다.

<하녀>의 하녀가 치정극의 희생양이 된다면, <기생충>의 힘없는 입주 가사도우미는 복수극의 제물이 된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빈 저택에서 술판을 벌인 기택(송강호) 식구에게 지난날 쫓겨난 문광(이정은)이 나타났을 때, 인터폰 너머로 검은 우비를 두르고 서 있는 그녀는 이미 다치고 피 흘린 상태다. 문광의 재등장을 기점으로 더이상 평화롭게 계단을 오르내리지 못하게 된 <기생충>의 노동자 가족들은, 갖은 수를 써서 집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잔인하게도 봉준호 감독은 집 밖의 계단을 현실의 계급 차만큼 길고 장황하게 내면서 인물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하녀>의 계단은 관객의 정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상하 감각과 더불어 원근감이 강조되는데, <기생충>의 계단은 화면의 이쪽과 저쪽을 가로지르는 좌우 운동으로 확장되면서 야외로 끝없이, 끝없이 뻗어나간다. 한편 <충녀>(1972)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일본 곤충기>(1963)와 더불어 <기생충>에 ‘충’이라는 관객에게 호감을 사고픈 강박이 없는 한 단어를 불러들인다. 리메이크와 창작의 모호한 경계 아래서 <하녀>를 포함한 세 작품 모두 동식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연속으로 등장하는데, 남자를 둘러싸고 집안의 안주인과 가정부가 갈등하는 구도도 반복된다. 특히 <충녀>와 <육식동물>은 아내와 하녀가 모종의 합의를 맺고 남자를 사육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기생충>에서 박 사장의 막내아들 다송(정현준)이 귀신 취급하는 근세(박명훈)의 상태가 바로 이렇다. 아내 문광에게 급히 젖병과 바나나를 받아 무는 근세의 모습은 경제적 무능과 함께 남성성을 잃어버린 <육식동물>의 동식(김성겸)이 기저귀를 차고 젖병을 무는 장면의 선명한 오마주로 보인다. 중산층의 위기와 붕괴를 내적 동인으로 삼는 김기영의 영화들에 이어, <기생충>은 더이상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을 만큼 격화된 계급구조의 쿰쿰한 냄새를 훅 끼친다.

<의식>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

<의식>(1995)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영항 아래서, 계급사회를 풍자하고 자신의 정치성을 범죄영화의 서스펜스로 풀이했던 클로드 샤브롤 감독의 후기 걸작이다. 교외 저택에 가정부로 취직한 소피(샹드린 보네르)는 범죄 전력이 있고 공감 능력이 다소 결여된 여성이다. 그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데, 이 허점이 드러난 순간부터 부르주아 가족들은 우월 의식을 선명히 내비치기 시작한다. 문맹 퇴치라는 사회적 과제의 실패 앞에서, 하녀 소피는 곧잘 품평당하고 무시당하다가 일순 폭발하고 만다. 은연중에, 미묘하게, 오랫도록 축적된 분노가 펑 터져나온 결과, 소피는 동네 우체국 직원 잔느(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저택에 구비된 사냥용 장총으로 일가족을 몰살한다. 날 선 파국이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클로드 샤브롤의 범죄영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전개다. <의식>의 토대가 된 루스 렌델의 원작 소설 제목은 . 국내에는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극>으로 번역됐지만(소피의 원작 속 이름이 유니스) 돌처럼 단호하고 차가운 심판 혹은 굳어버린 마음을 의미하는 원제가 작품의 파괴력을 훨씬 유용히 드러낸다. <기생충>에서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기택은 자포자기한 듯 눈을 가리고 기우(최우식)는 과거의 총명함을 잃어버린 채 눈빛이 탁해진다. 냄새에 사로잡힌 그들의 판단력이 조금씩 흐려지고 딱딱해지는 시점이 온다는 징표다. 똥물 속에서도 기우를 향해 떠오르고, 그를 따라다니며 버겁게 짓누르는 돌덩이에 의해, 그 계급의 버거움으로 인해 그렇게 기택 가족은 계획에 없었던 뜻밖의 일들을 저지르게 된다.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구로사와 기요시의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2016)은 타자를 향한 근원적 공포, 가족과 이웃이라는 전통적 관계망의 균열을 지적하는 범죄영화이자 낯선 호러다. 유능한 경찰 타카쿠라(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사이코패스의 심리를 간파할 수 있다고 자만하다가 눈앞에서 인질이 칼에 찔리고, 살인범 또한 자살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얼마 후 거주지를 옮기고 범죄심리학 교수로 새 삶을 시작한 그의 앞에, 인근 지역의 미제 실종 사건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이웃집 남자가 나타난다. <크리피…>는 일상적 풍경 속에서 섬뜩한 이질감을 포착한 숏의 역량, 숏의 연결로 힘 있게 굴러가는 영화다. 평범한 시공간을 생경한 공포로 구체화시키는 구로사와 기요시만의 터치가 압도적이다. <크리피…>에서 주인공의 동료 경찰 노가미(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연쇄살인범 니시노(가가와 데루유키)의 집 안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의 무서움은, <기생충>에서 처음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충숙(장혜진)이 빨려들 듯 뛰어내려갈 때 느낄 수 있는 감각과 유사하다. 문 하나를 경계로 이미지와 사운드가 급격히 전환되며, 이 순간 리얼리티는 은밀히 굴절된다. 잠재된 공포, 감각을 마비시키는 당혹스러운 낯섦에 압도당하는 순간이다. 끔찍한 순간에 숏은 끊기지 않고 롱테이크를 지속(기우를 돌로 내리치는 근세)하며, 백일몽 같은 그로테스크한 장면(칼을 맞고 쓰러지는 박 사장)이 침투하기도 한다. 이들 모두 봉준호 감독이 지난 제작기 인터뷰(<씨네21> 1209호, 특집 인터뷰 ‘명치에 얹힌 돌’ 기사)에서 언급한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안전벨트”를 매고 싶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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