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구, 아니 형민은 어린 시절 <형구네 고물상>이라는 TV드라마에 출연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고물상을 하는 가난한 집의 순한 둘째 아들 진구를 연기했던 형민은 극중 가난을 마치 실제의 것처럼 느끼며 유년을 보낸다. 형민은 38년이 지나 <그 시절, 그 사람들>이라는 방송에 나가 과거 드라마에 출연했던 당시의 추억과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를 소회한다. 처음엔 당시의 에피소드를 프로그램 속성에 맞게 술회하며 출연자의 본분을 다하던 형민은 점차 자기의 말들이 변명과 후회로 점철되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그 시절, 그 사람들>은 형민에게만 복귀 방송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의 사회자 역시 불미스런 사건으로 6년 동안 방송을 쉬다가 공중파에 복귀한 남자다. 더이상 배우도, 스타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이자 이혼남인, 어찌 보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는 형민에게 그는 연민 혹은 동질감을 느낀다. 말을 하면 할수록 형민은 자신이 일생 동안 잘못된 선택과 실패만 번복해왔다는 걸 재확인한다. 한때 사랑받았던 지나간 아역스타가 실패한 현재의 삶을, 시청률 1%대의 심야방송에 나와 고백하는 일은 어딘지 서글픈 장면이다. 하지만 드라마 촬영장의 풍경에서 시작해 최근의 직장 풍경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노라면 누구의 인생인들 별다를까 싶어진다, 삶이란 보통 그러하지 않을까. 특별히 실패한 것도 성공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내게 주어지는 것을 취하며 꾸역꾸역 살아냈던 삶.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그것은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한여름 폭죽처럼 짧게 터지고 흩어져버린 환희와 그 뒤에 지루하게 이어졌던 실패들, 사이사이에 마주한 상냥한 만남들과 두근거림, 반생에 걸친 형민의 삶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른다. 이것은 어느 실패한 아역스타의 인생이 아니고, 내 인생 이야기로구나.
유서
책상 위에는 유서가 놓여 있었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민은 유서를 찍은 사진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보았다.(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