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초희 / 한국 / 2019년 / 96분 /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예술영화가 존재의 이유이자 삶의 모든 것이었던 여자의 인생 2막을 코믹하게 그렸다. “시집은 못 가도 영화는 찍고 살 줄 알았던” 영화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평생의 작업적 동반자라고 믿었던 감독이 술자리에서 폭음 도중 돌연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직업을 잃고 만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 믿는 제작자(최화정) 앞에서 자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당혹스럽고, 셋방을 내어준 집주인 할머니(윤여정)는 어딘가 까탈스러워 눈치가 보인다. 금전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친한 배우(윤승아)의 제안에도 “아니, 일해서 벌어야 한다!”라고 대찬 부산 사투리로 대답하는 찬실은, 매일 조금씩 눈물짓는 척박한 나날들 속에서도 특유의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이는 찬실이 오즈 야스지로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덕분이기도 한데, 그녀는 그렇게 추운 겨울날 출퇴근길에 ‘햇볕 속의 모과나무’를 올려다보거나 장국영의 유령과 소통하면서 여전히 영화적으로 살기를 멈추지 않는다. 말끔한 만듦새, 적당한 거리두기와 자조를 허락하는 감수성이 장점이다. 영화계에 범상한 소재일지라도 그것을 다루는 톤 앤드 매너가 상쾌하다면 언제든 관객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
<윤희에게>
임대형 / 한국 / 2019년 / 106분 / 폐막작
윤희(김희애)는 “사람을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왜일까? 그녀는 어쩌다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들까지 외롭게 만들어버렸을까. 임대형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윤희에게>는 남편(유재명)과 이혼하고 고등학생 딸 새봄(김소혜)과 살아가는 윤희의 삶에 편지 한통을 띄운다. 조금 먼 곳에 사는, 오래전 친구가 보낸 그 편지 한통은 곧이어 윤희와 새봄을 계획에 없던 여행으로 이끈다. 자신을 감추고 물러서는 데 익숙해져야 했던 여성 윤희가 온전한 회고와 그리움에 잠길 수 있도록 허락하는 곳,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아름다운 설경의 도시다. 이제 막 사랑을 배워가는 딸과 사랑의 상실을 복기하는 엄마는 그렇게 타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고대하던 누군가와의 재회를 꿈꾼다. 감독의 데뷔작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2016)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고 유유한 영화인 <윤희에게>는 삶의 호시절이 지나가버린 사람들에 대한 탐구이자 위로다. 눈처럼 내린 시간의 더께 아래에는 사랑의 폐허가 녹슬 줄 모르고 남아 있지만, 지금의 자리에서 서로를 아끼고 가여워하는 사람들이 부드럽게 연대하며 새로운 일상이 꾸려진다.
<시네마 동키> Cinema Donkey
샤에드 아마드로우 / 이란 / 2019년 / 78분 / 아시아영화의 창
<시네마 동키>는 영화의 중요 장면에 등장할 당나귀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탭들의 위기를 다룬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 탓에 당나귀를 사는 것은 물론이고 빌리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 게다가 감독은 완성도 있는 연기를 할 줄 아는 프로페셔널한 당나귀 배우를 원하는 터라 모두가 난감한 고민에 빠진다. 로드무비의 구조로 당나귀 찾기 여정을 따라가는 영화는 길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군상 속에서 이란 사회의 서민적 삶과 생활의 어려움도 넌지시 바라본다. 결국 어느 할아버지와 손자가 키우는 흰 당나귀를 훔쳐 촬영장에 데리고 간 제작부 일행은 무조건 검은 당나귀여야 한다는 감독과 대치하면서 영화의 예술성과 진실성을 고민하기에 이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고, 가짜를 진짜라고 속여야 하는 어떤 숙명을 그리는 이 영화는 동물, 아이, 노인 캐릭터를 우화적으로 배치해 순수함이라는 가치를 역설한다.
<나는 집에 있었지만…> I Was at Home, But
앙겔라 샤넬레크 / 독일, 세르비아 / 2019년 / 105분 / 월드 시네마
<나는 집에 있었지만…>은 13살 소년 필립이 얼마간 홀연히 사라졌다가 집에 다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흙이 잔뜩 묻어 더러워진 차림새가 그가 자연 속에서 머물다 왔다는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할 뿐, 엄마인 아스트리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이들 가족에게는 어떤 비밀이나 상처가 있을 법하지만, 내러티브 영화의 서사적 장치에는 관심이 없는 앙겔라 샤넬레크의 영화는 가장 주변적인 것들로부터 정수에 다가간다. 중요한 정보는 돌연 발설되고, 인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 장면을 살아간다. 카메라의 불투명한 시선 너머로 확증할 수 있는 것은 아스트리드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가정의 내외부에서 주어진 역할을 아슬아슬하게 수행해나가고 있다는 불안뿐이다. 인공 후두를 써서 말하는 남자에게 중고 자전거를 샀다가 자전거가 금세 고장나 실랑이를 벌이고, 필립의 학교 선생님들을 찾아가 아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닌지 항의하고,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자녀들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미술관을 배회하는 모습이 나열된다. 정물처럼 화면 안에 무표정하게 놓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것은 오로지 그 순간의 상태이며, 영화는 여기에 야생동물이나 죽은 듯 잠든 사람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활용하면서 존재의 위기에 관해 개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올해 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감독상) 수상작으로, <마르세유>(2004), <꿈길>(2016) 등을 연출한 독일 감독 앙겔라 샤넬레크 특유의 기이한 리듬감이 인상적이다.
<크라비 섬> Krabi, 2562
벤 리버스, 아노차 수위차콘폰 / 영국, 타이 / 2019년 / 93분 / 아시아영화의 창
타이 남부의 이름난 관광지인 크라비섬에 제각기 다른 목적으로 당도한 사람들이 백일몽 같은 신비로운 일을 겪는다. 광고 촬영이 한창인 어느 해변가, 촬영 종료 후 노래방에 갈 기대로 부풀어 있는 백인 감독은 현지 스탭과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데도 개의치 않는다. 이 장면을 필두로 영화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소비되는 크라비섬의 표층 아래로 서서히 잠수를 시작한다. 중심 인물은 새 영화의 로케이션을 찾기 위해 안내인과 함께 조용히 섬을 여행 중인 어느 여성감독이다. 그녀는 외딴 지역을 배회하며 토착민들을 만나 긴 대화를 나누고, 채 상품화되지 않은 크라비섬의 비밀스럽고 원시적인 특성을 발견해나간다. 섬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크라비의 현재와 과거가 통시적이고 다원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낮에 관광객들로 붐볐던 동굴의 모습은 이어지는 숏에서 밤이 되자 원시부족들이 불을 피워올린 선사시대로 돌아간다. 장면의 낯선 연결, 환상적 묘사, 보이스 오버로 서로 다른 시간대의 이미지와 소리를 공존시키는 방식 등을 통해 영상언어의 경계를 시험하고 역사의 영적 체험을 추구하는 영화다. 실험적인 영상 작업으로 잘 알려진 벤 리버스 감독과 14회 부산영화제에 소개됐던 <우주의 역사>(2009) 이후 활발히 활동 중인 타이의 아노차 수위차콘폰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