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스페인 세비야 지방까지는 비행기로 스무 시간 남짓 걸린다. 하지만 여성이라면, 도시가 아닌 곳에서 태어났다면, 이렇게도 비슷할까 싶어 답답하고도 반가우리라. 카르멘 G. 데 라 쿠에바는 어려서부터 시골 마을 공동체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에 거부감을 느꼈고 뚱뚱한 외모를 가지고 놀려대는 남자아이들에게 분노했으며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절박하게 주문을 외웠다. 좁은 현실을 확장시켜준 존재는 <작은 아씨들>의 조 마치, <삐삐 롱스타킹> 시리즈의 삐삐 같은 여성 캐릭터들이다. 홀로 책에 빠져 지낼 땐 은둔하면서도 자유로웠던 에밀리 디킨슨을 생각하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으며 저임금 노동과 가사노동 및 육아에 매인 주변 어른 여성들을 고찰했다.
장학금이라는 탈출버튼을 눌러 독일로 떠난 시절에는, 25살에 세계 일주를 해낸 여성 넬리 블라이를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갖가지 국적의 좌절한 학생들이 뛰어내려서 ‘자살자들의 기숙사’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완벽한 고독과 행복을 맛보았다는 대목에 공감할 수밖에. 하지만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대도시에 정착할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어려운 21세기. 저자는 장학금을 따라 거주지를 옮기며 불안정하게 살면서, 역시 먼 곳으로 공부하러 고향을 떠난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동료 삼아 읽고 또 읽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파티에서 친구가 당한 강간사건을, 비르지니 데팡트의 <킹콩걸>을 읽은 뒤 재구성하기도 한다. 피해자는 결코 잘못이 없으며 우리는 생존자라는 선언.
결국 저자는 현재 대신 미래만을 꿈꾸던 대도시의 삶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좌절 속에서 힘이 되어준 것은 증조할머니의 서사였다. 프랑코 독재 시절 암거래 시장에 뛰어들어 가족을 먹여살린 강인한 할머니를 생각하며 ‘내 인생에서 매일매일 지루하고 공허한 날들’을 버티는 것이다. 저자가 현재 여성문학을 읽고 연구하는 책모임을 꾸려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책이 멋진 번역을 거쳐 한국 독자들에게 도달한 사실이 반갑다.
소녀로 살기
“자기 팬티의 마른 핏자국을 비누칠해 빨아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6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