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펼치면 여름 냄새가 난다. 솜털이 날리는 덥고 건조한 시골의 여름, 건초 더미, 차갑고 묵직한 야외 수영장, 햇볕에 탄 피부의 감촉. 주인공 캐머런은 수영선수로 활동하는 10대 청소년으로, 몬태나에서 친구와 애인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레즈비언 정체성을 찾아간다. <이방인>처럼, <사라지지 않는 여름> 또한 부모님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친구 아이린과 캐머런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인생 첫 키스를 나누며 짜릿한 순간을 보낸 그때, 부모님이 매해 찾아가던 퀘이커 호수에 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캐머런은 부모님의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들키지 않겠다고 안심하고 그런 자신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이 죄책감은 매 순간 캐머런을 따라다닌다.
사랑과 우정, 이별과 불안과 슬픔이 떠돌며 하나의 밧줄로 얽힌 여름의 시간은, 사랑했던 친구의 배신 혹은 고발로 인해 끝난다. 이 단절을 보며 레드클리프 홀의 퀴어 고전소설 <고독의 우물>을 떠올리는 독자도 있으리라. 2005년 부모에게 커밍아웃했다가 전환 치료 시설에 보내진 경험을 고발한 잭 스타크의 사연에 영향을 받은 소설이라고 저자가 밝혔듯, 소설의 후반부는 기독교와 사랑의 이름으로 퀴어 청소년을 감금하고 괴롭히는 시설의 모습을 자세하게 그린다. 대마를 키우며 숨통을 찾는 제인을 비롯하여 캐머런의 세계를 확장해주는 친구들이 시설에 있긴 하지만,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시설에서 지낸다는 것 자체가 지독한 것이다. 신앙심 깊은 캐머런의 이모와 할머니가 악인이 아니듯, 시설의 운영자들 또한 명백한 악의를 가진 악당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대속이라는 말로 그릇된 짓을 저지른다는 점이 한숨 나오는 부분이다. 전세계적으로 전환 치료를 금지하는 추세인 한편 한국에서는 전환 치료가 슬금슬금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으며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여전히 불안과 우울을 앓기 쉬운 상황이라는 사실 또한 이 책을 배경이 과거인 소설로만 여기기 어렵게 한다.
자기혐오를 심는 장소
“이곳의 설립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어서 변하게 만들려는 거라고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해야 한단 말이에요.”(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