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바람이 흙먼지를 뿌리며 슬레이트 지붕을 엎는 골목. 가난의 풍경을 짊어지고 미래로 가겠다고 다짐하는 여자. 인터넷에서도 소문난 단편 <도둑맞은 가난>은 부자가 제 이력서에 가난 체험까지 집어넣겠다며 한칸 방 살기를 했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들이 가난에 진저리치다 죽어버린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젊은 여성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여름 아침의 억센 푸성귀’처럼 힘차고 청정한 구석을 발견하고서 가난을 소명 삼아 살기로 다짐했는데, 누군가는 그 가난을 한번 겪고 말 경험으로 치부하니 의미를 빼앗겨버려 치욕을 느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치욕 속에 분노하는 순간마저도 너무나 생생하게 활기를 뿜어내 매혹적이다. 미군기지에서 물건을 능숙하게 빼내 팔던 <공항에서 만난 사람>의 무대소 아줌마도 그렇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는 단번에 읽어내릴 만큼 재미있지만 독자를 쥐고 흔드는 힘이 워낙 강해 책을 덮고 쉬고 싶기도 한 박완서 작가의 단편집이다.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선 항암제 치료를 받으며 머리가 빠져 다시 모자를 챙겨 쓰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신혼 시절보다 더 가슴 떨리는 순정을 품는다. 작가는 이를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라고 쓴다. 매혹의 곁에는 집요해서 진저리나는 욕망도 있다.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대접을 받겠다는 부모와 가문의 욕심, 여아들이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살해당한 시절의 기억이 <꿈꾸는 인큐베이터>에 펼쳐진다. 곳곳에 생활을 단단하게 꾸려가는 중노년 여성들의 모습이, 여기 내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듯 선명하다. 이제는 의식이 흐릿한 유명 문인의 일회용 똥 기저귀를 능숙하게 갈아주며 돈을 버는 아주머니, 아들이 인민군 총에 맞아 쓰러진 뒤 “몰라요”라며 도리질만 하는 시어머니를 보살피며 돈 버는 여인숙 주인. 가난과 계급, 죽음, 투병과 가족…. 다 읽고 나면 무수한 생각이 떠오른다.
가난에 대하여
“가난을 정면으로 억척스럽게 사는 사람들의 이런 특이한 발랄함을 우리 어머니는 얼마나 치를 떨며 경멸했던가.”(1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