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씨네21 추천도서 <에디 혹은 애슐리>
2020-08-18
글 : 이다혜
김성중 지음 / 창비 펴냄

“오년에 한번 있는 가족 모임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성공한 이민자들인 거예요. 오지 못한 가족들에 비하면 말이죠. 살던 나라에서 다시 청소부, 택시기사, 가정부로 돌아간다 해도 할머니의 식탁에 앉아 있는 이 순간에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자화자찬이 끝나자 비밀들이 불려나왔습니다.” <레오니>의 화자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필리핀 마닐라까지 서른 일곱 시간을 비행해 떠나는 레오니다. 오년에 한번, 증조할머니가 소집하는 가족 모임을 위해 부모님과 쌍둥이인 뻬드로까지 네 가족이 여행을 떠났다. 어딘가의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친척들은 모처럼 집을 찾아 으스대기도 하고, 근심을 늘어놓기도 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레오니는 이미 성인이 된 지 오래고, 이날 밤의 기억을 수없이 되새김질하며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에디 혹은 애슐리>는 기상이변으로 시작해 노화도, 죽음도, 성장도 없는 세계에 인류가 갑자기 들어선 뒤의 상황을 그린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실험이 가능해지고 젠더는 가장 먼저 유동적으로 변했다. 그리고 주인공은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데가 있는 로봇 엔도와 살기 시작한다. 사랑을 박제한 남자 사파테로는 햄버거 빵에 붙은 깨를 흙에 심었다가 거대한 나무로 성장한 모습을 발견한다(<나무추격자 돈 사파테로의 모험>). 어느 날 갑자기 배꼽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도 입으로는 하지 못할 속내를(<배꼽 입술, 무는 이빨>). 라푼젤과 도로시와 빨간 모자와 길 위를 걷는 소녀(<마젤>). 이 소설집에 실린 김성중의 소설들은 회고하는 정서를 띠고 있는데, 과거를 떠올리는 일은 좋거나 나쁘다는 가치판단보다는 개인사에 대한 무감한 정리작업처럼 보이곤 한다. 마치 때를 놓친 편지처럼 과거의 인연이 불쑥 튀어나올 때, 혹은 시간이 멈추거나 다시 흐를 때, 나무가 자라고 나무에 먹힐 때, SF와 판타지는 (믿을 수 없게도) 유일하게 가능한 현실감각을 제공한다. 충분히 돌아보았으니, 이제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갈 때가 되었다. 가장 먼 미래로 날아가 지금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일 때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스무살이란 가벼운 풍선 같은 것이어서 주영은 무거운 것에만 끌렸다. 두꺼운 책, 묵직한 개념, 무거운 문장들. 주영은 긴장감 속에서 납덩이 같은 그 무게를 간직했다.(<정상인>, 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