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쉽게 떼지 못하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내 안이 텅텅 비어 꺼낼 것이 없을 때, 다른 하나는 반대로 너무 가득 들어차 있을 때다. 담아낸 것들을 욕심껏 쏟아내기엔 내가 가진 말주머니의 입구가 너무 좁아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그럴 땐 책장 근처를 서성이며 아무 상관없는 책을 뒤적거려본다. 올해 부산영화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하얀 종이를 펼쳐놓고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내다 문득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꺼내들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사람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이 이곳에 살았다.” 인류의 역사와 기억, 그 모든 순간을 담아내는 저 위대한 문장은 결국 창백하고 푸른 점 하나로 수렴된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애쓰지 않기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담백한 진리의 문장. 올해 부산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는 내려놓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1일차
개막작: 되돌아본다는 것, 각오를 다지는 시간
<씨네21>은 매해 부산영화제에서 데일리 잡지를 맡아 발행해왔다. 올해는 혼자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이별을 강요한다. 서울에서 진행되는 인터뷰들을 다른 기자들이 소화하고, 나는 부산이 고향이라는 이유로 뽑혀 부산으로 향했다. 홀로 누비는 영화의전당은 마치 처음 발을 디딘 곳인 듯 모든 것이 낯설다. 192편의 상영작 소식을 어떻게 다 전할 수 있을까, 올해 달라진 분위기와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한참을 머리를 싸매다 문득 그것이 애초에 부질없고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해운대 백사장이 광활하다 해도 내 손에 쥘 수 있는 모래는 한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부산영화제의 모든 것을 전할 순 없다. 생각해보면 그건 동료들과 함께 매일 잡지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물리적으로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한줌의 영화들뿐이다.
그리고 때론 그걸로 충분하다. 길을 헤맬 때마다 꺼내보는 내 인생의 등대같은 영화,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은 시대를 관통하는 진실들을 담고 있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미덕을 발휘한다. 되돌아본다는 건 그런 것이고, 진실은 항상 막간에 깃든다. 여기 5번의 기자시사와 4번의 기자회견을 포함해 겨우 30편 남짓한 영화들을 보며 겪은 체험의 단편들을 전한다. 이것은 서울과 부산을 두번 오간 5일간의 기록이자 한명의 관객으로서 만났던 부산영화제에 얽힌 유일무이한 기억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개막작 <칠중주: 홍콩 이야기>가 전하는 울림은 남다르다. 칸국제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된 옴니버스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2007)처럼 마치 기획 발주된 프로젝트가 아닌지 착각이 들 만큼 올해 부산영화제의 상황과 입장, 태도를 진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1950년부터 2020년까지 홍콩의 기억과 역사를 반추하는 이 영화는 홍콩영화의 살아 있는 역사라 할 7명의 감독, 홍금보, 허안화, 담가명, 원화평, 두기봉, 임영동, 서극이 시대별로 홍콩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옴니버스영화가 으레 그렇듯 작품마다 편차도 있고 전혀 다른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는데, 신기하게도 영화가 끝날 즈음이면 서로 다른 색깔의 이야기가 하나의 화음처럼 차례차례 겹쳐 홍콩의 오늘에 다다른다. 그야말로 ‘칠중주’라는 제목이 썩 잘 어울리는 결과물이다.
각자 맡은 10년의 시간을 10분의 영화 안에 압축하는 비결은 단순하다. 그 시절을 살았던 누군가의 삶을 빌려 홍콩과 자신이 쌓아온 시간을 증명하는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건 실은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되돌아본다’는 행위에 있고, 자연스럽게 지금 발을 디디고 서 있는 자리가 드러난다. 아마도 7인의 감독들이 시간을 거슬러 더듬는 건 지나간 영광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일 것이다. 지나온 자리를 확인하는 것으로 앞으로의 방향을 다짐하는 과정. 격변하는 홍콩의 현재 위에 제작된 <칠중주: 홍콩 이야기>와 풍랑 한가운데 놓인 부산영화제가 겹쳐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7편의 에피소드 모두 각각의 매력이 있지만 특히 눈가에 아른거리는 작품은 허안화 감독의 <교장선생님>이다. 단순하게는 항상 학생들의 입장에서 배려했던 진정한 교육자인 교장 선생님의 후일담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허안화 감독의 영화가 늘 그랬듯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깃든 공백이 울림을 만들어낸다. 교장 선생님과 왕 선생님 사이에 오갔을 미처 꽃피우지 못한 마음들은 3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의 일화를 담은 ‘담화일현’(昙花一现) 네 글자로 요약된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적 같은 인연, 덧없이 찰나에 스쳐 지나가기에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 있다. 때론 영화와 관객의 만남, 영화제와의 추억도 그와 같다.
2일차
극장 바깥의 이야기: 규모가 줄어든 만큼 높아진 밀도
매해 새롭다고 홍보하곤 하지만 올해 부산영화제의 풍경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처음이다. 영화의전당 주변에선 축제의 열기를 전혀 느낄 수가 없다. 그 흔한 포스터와 현수막 하나 걸려 있지 않은 풍경이 언뜻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지만 잠시 뒤 영화를 마치고 극장을 나선 이들의 걸음이 하나둘 모이는 걸 보며 불씨를 확인한다. 위기가 닥칠 때 진면목이 드러나는 법, 현실적인 이유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다보면 결국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제일 마지막 줄에 남기 마련이다. 올해 부산영화제가 소거법 끝에 도달한 것은 영화와 관객의 만남이다. 192편의 영화가 영화의전당 5개관에서 영화당 1번씩 상영되는데, 이 숫자는 어찌보면 가용 가능한 물리적 환경하에서 역산한 숫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영화와 관객의 만남이 원천적으로 제한받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제는 마지막까지 관객을 선택했다. 이것은 “코로나19 시대의 영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영화제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부산영화제의 답이기도 하다. 담화일현, 유일무이하고 소중한 192번의 꽃송이가 올해 부산에서 피고 진 셈이다.
오프라인 상영으로 가닥을 잡은 만큼 방역은 과하다 싶을 만큼 철저했다. 영화의전당 외곽을 둘러싼 펜스를 통과하기 위해 첫 번째 방역을 통과하고 나면 건물에 입장하기 위해 두 번째 관문을 거친다. 마지막으로 극장에 들어서기 전 방역까지, 영화와 만나기 위해 매번 3번의 체온 검사와 방역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까다로운 절차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25%의 좌석만 운용하는 원칙에 따라 극장 안의 좌석 역시 거리두기에 철저한 모습을 보였다. 야외극장은 600석, 다른 극장의 경우 150석에서 50석가량의 관객만이 입장 가능한 까닭에 한편으론 허전했지만 다른 관점에선 쾌적한 관람 환경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저히 온라인 선착순 예매로 진행되어 표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지만 역설적으로 티케팅에 성공한 관객은 그만큼 최적의 환경에서 영화와 만날 수 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문득 어쩌면 이것이 극장의 미래가 아닐까 싶어 복잡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코로나19로 아마도 극장의 영토는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의 축소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거꾸로 영화의 순수성과 다채로움을 북돋울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올해 부산영화제를 찾은 관객수를 다 합쳐도 1만명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예년에 비하면 규모로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거꾸로 밀도는 더 올라가고 열기는 더해진 면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사실 준비 과정에서 부산영화제가 보여준 모습들이 매끄러웠다고 평가하긴 힘들다. 외부 상황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다는 걸 감안해도 전반적으로 준비와 대처가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 축제 한가운데 관객 입장에 서보니 오직 영화에만 철저히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온라인 플랫폼의 활용법이다. 오프라인 상영이라는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부족하거나 아쉬운 지점을 준비된 인터뷰 영상이나 비대면 온라인 관객과의 대화(GV) 등으로 보충하는 모습에서 오프라인과 온라인 사이 모범답안 같은 균형 지점을 발견한듯 보인다. 영화 시작 전 감독들의 인사말은 영화에 대한 흥미를 돋우고, 풍성한 GV는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높였다.
올해는 192편의 영화 중 총 135회의 GV(온라인 90회, 오프라인 45회)가 이뤄졌는데 횟수도 횟수지만 진행방식이 더 매끄럽게 다가오는 면도 있었다. 한마디로 규모가 줄어든 만큼 전체적인 밀도가 올라갔다. 이는 192편의 상영작의 면면도 마찬가지다. 영화제 상영작이 본래 과감한 시도와 도전에 가치를 두는 만큼 다소 아쉬운 작품들도 있기 마련이고 실패 또한 영화제만의 즐거움 중 하나지만 한 차례 더 엄선된 영화들이라는 걸 증명하듯 대체로 고른 만족도를 보였다.
또 하나 재미있는 풍경은 텅 빈 광장과 공간, 영화제 곳곳의 공백을 메워주는 목소리들이다. 일체의 야외행사도,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는 탓에 영화의전당의 거대한 공간에는 압도적인 황량함이 들어찼다. 그럼에도 쓸쓸함의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던 건 영화제를 응원하는 여러 감독들의 화상 인터뷰가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복작거리는 축제 분위기 대신 사운드로 채워낸 위안의 순간. 그중에서도 특히 가와세 나오미,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기요시, 박찬욱, 이강생, 이창동, 자오타오, 지아장커, 차이밍량 등 9인의 아시아영화 홍보대사들의 메시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화를 반드시 찍고자 하는 욕망과 영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는 한 영화는 계속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바람이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깝게 들린다. 25회 부산영화제는 이 단호한 확신을 물리적으로 직접 증명하기 위한 시간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러고서 문득 광장을 바라보니 극장과 극장 사이를 배회하는 관객의 걸음은 잡히지 않을 답을 찾아 헤매는 유령의 걸음처럼 느껴졌다. 일말의 쓸쓸함이 묻어나지만 지치지 않은 걸음들. 총총거리는 걸음들 뒤로 또다시 감독들의 차분한 목소리들이 겹친다. 이 상황 자체가 하나의 전위예술, 집단무용처럼 보이는 순간. 이름표를 붙이고 싶어졌다. 제목은 이 정도가 어떨까. ‘이렇게나마 우리는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