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우리가 나고 자란 공간 위에 차곡차곡 쌓인 기억이다. 홍콩의 정신은 도서관에 꽂힌 역사서 안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홍콩 위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들 사이에 깃들어 있다. <칠중주: 홍콩 이야기>는 1950년부터 2020년까지 홍콩의 다양한 이야기를 시대별로 7편의 단편에 담아낸 옴니버스영화다. 한평생 영화에 헌신해온 감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홍콩을 기억하고 애정을 드러낸다. 이 영화는 개인의 기억이자 홍콩의 역사이며 과거인 동시에 현재다. 홍콩의 전설적인 감독 7명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주도한 사람이 있으니, 다름 아닌 두기봉이다. 프로듀서와 감독을 맡은 두기봉에게 <칠중주: 홍콩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그는 매번 대답할 때마다 ‘내’가 아닌 ‘우리’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에 진심이 맺혀 있다.
-홍금보, 허안화, 담가명, 원화평, 임영동, 서극 그리고 당신까지 7명의 감독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칠중주: 홍콩 이야기>는 홍콩 영화인들의 결속력을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다. 서로 다른 영화사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영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 노력해왔다. 우리는 필름이 디지털영화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느낌과 질감을 준다고 믿는다. 이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나는 필름 시대의 아름다운 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동료 감독들을 초대했다. 원래 오우삼 감독도 함께하기로 했지만 아쉽게도 건강 문제로 무산되었다. 7인의 감독들은 재정적인 문제를 초월해 흔쾌히 참여해 연대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정신이 신세대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1950년대부터 2020년까지 10년 단위로 홍콩의 여러 얼굴을 조망한다. 각각 맡은 시대는 정해져 있었나.
=그렇다. 우리는 각자 주어진 10년의 기간을 이용하여 홍콩의 정신과 역사를 조망하는, 의미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고자 했다. 누가 어떤 시대를 맡을 것인지는 무작위 추첨을 통해 결정했다. 중요한 건 각자 맡은 기간 동안 홍콩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념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영화는 홍콩의 역사와 존재의 증거가 될 것이다. 내가 아이디어를 제안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참여 의사를 밝히며 열의를 보였다. 이 프로젝트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당신이 연출을 맡은 <보난자>는 2000년대 초 아시아 금융 위기와 닷컴 버블, 사스 위기 등을 거친 극적 반전의 시대에 주식 투자에 열중했던 청춘들의 모습을 그린다.
=내가 맡은 시대는 2000년에서 2010년까지였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우선 주목한 것이 전세계적인 문제였던 ‘닷컴’ 거품이다. 또 다른 이슈로는 오랫동안 지속된 전염병 사스가 있었다. 사스는 2007~2008년 금융 위기 직후, 홍콩 경제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다. 두 가지 키워드의 연결고리로서 나는 금융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홍콩은 매우 활기찬 도시다. 사람들은 홍콩으로 여행을 오고 돈은 홍콩으로 모인다. 자연스럽게 홍콩은 외부의 영향에 민감하다. 그런 측면에서 부동산과 금용시장은 홍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들이다. 국제도시 홍콩의 자유로움은 우리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내가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인생에서 얼마나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이다. <보난자>는 당신의 인생에서 기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영화다.
-세 친구는 같은 식당에서 계속 만나고 헤어진다.
=한명은 공격적이고, 다른 한명은 보수적이며, 나머지 한명은 우유부단하다. 이 세 가지 특징은 일반적인 홍콩 사람들의 특징을 대변한다.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차찬탱(홍콩스타일 카페)은 홍콩의 중요한 문화적 공간이다. 세 친구는 모두 동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중하류층이고, 나는 그 시대에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설명하기 위해 세 청년의 눈을 빌렸다. 그곳에서 들을 수 있는 소음은 홍콩을 대표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7명의 감독들이 각각 특정한 공간을 통해 홍콩을 추억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공간 중 하나는 빌딩 숲, 그리고 건물 옥상이다. 홍콩의 야경도 빼놓을 수 없다.
=홍콩은 모든 각도에서 특별한 것이 있는 매우 독특한 도시다. 이곳에는 서양과 독특한 전통 광둥 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이곳은 그 자체의 자연적인 장엄함을 지닌 국제적인 도시다. 홍콩의 특수성은 세계 여러 곳과 비교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 자체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작위 추첨에 맞춰서 시대를 결정했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간도 주어졌다. 각 감독이 꼽은 공간들은 그들이 맡은 10년을 대표할 만한 곳들이고 각자 특색을 잘 잡아내어 이야기에 녹여냈다. 영화 속 모든 공간이 홍콩을 이야기하는 장소라 할 만하다. 그곳들은 모두 홍콩의 과거, 각 감독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밀접하게 이어진다. 매우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다채로운 공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영화를 제외하고 7편의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을 하나만 꼽는다면 무엇인가.
=2010년대를 다룬 임영동 감독의 <길을 잃다>를 꼽고 싶다. 임영동을 알고 지낸 지 40년이 넘었지만 이번 작품은 그동안 그가 보여주었던 영화들과 매우 다르다. 때문에 <길을 잃다>를 보는 내내 놀라움에 휩싸였다. 임영동이 가슴에 그런 세계를 품고 있었다는 건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임영동 감독은 2018년 12월29일 63살로 세상을 떠났다.-편집자). 사실 7명의 작품들 모두 각자의 특성과 취향이 진하게 묻어나고, 그 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 홍콩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월을 버텨온 차이들이 결국 각자의 관점들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진한 향수를 느끼고 한편으로는 지나온 인생을 음미할 수 있다. 그것이 영화 아닌가.
-현재 홍콩은 1997년 중국 반환이 결정되었을 때만큼 불안하다.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것 같다.
=홍콩은 수많은 풍파와 혼란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처럼 화려하고 활력이 넘치고 자유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데 여러 세대에 걸친 노력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1997년 이후 지속 가능한 방향을 찾지 못한 것이 아쉽다. 현재 홍콩, 홍콩인들은 다음 세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동기 부여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다.
-반면 1990년대 말에는 그와 같은 혼란과 불안이 담긴 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시민들의 불안이 영화로 표출되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
=우리 삶에는 이미 많은 혼란과 불안이 있다. 나는 이것을 굳이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구태여 영화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 대신 우리는 느낄 필요가 있다. 지금 현재의 삶 속에 과거의 홍콩, 홍콩이 뚫고 지나온 역경의 시간이 함께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홍콩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긍정의 에너지를 전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빛나는 결과를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홍콩은 무엇인가.
=홍콩은 우리의 고향이고 집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여러 가지 열매들을 키우고 맺어왔다. 홍콩을 빛나게 만든 것은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던,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작품들이다. 자유, 정의, 법치를 지켜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탁월함을 언제까지고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