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영화와 연결되다 1>에서 이어집니다.
입을 쉽게 떼지 못하는 건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내 안이 텅텅 비어 꺼낼 것이 없을 때, 다른 하나는 반대로 너무 가득 들어차 있을 때다. 담아낸 것들을 욕심껏 쏟아내기엔 내가 가진 말주머니의 입구가 너무 좁아 어떻게 운을 떼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그럴 땐 책장 근처를 서성이며 아무 상관없는 책을 뒤적거려본다. 올해 부산영화제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하얀 종이를 펼쳐놓고 멍하니 시간만 흘려보내다 문득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꺼내들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사람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람이 이곳에 살았다.” 인류의 역사와 기억, 그 모든 순간을 담아내는 저 위대한 문장은 결국 창백하고 푸른 점 하나로 수렴된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애쓰지 않기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담백한 진리의 문장. 올해 부산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는 내려놓은 것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3일차
단절, 경계, 연결: 영화는 세상을 이을 수 있을까
영화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몇편 되지 않는 영화로 감히 경향을 논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들은 모든 순간들은 한 가지 테마와 고민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절의 시대에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순간을 선사할 수 있는가. <트루 마더스>의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만날 리 없는 사람들이 만나는 기적 속에서 구원 받는 생명이 있다. 우리는 단절을 넘어 이어지고 그 끝에서 영화라는 존재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트루 마더스>는 일본의 독특한 양자결연 제도를 소재로 한 영화다. 아이를 가지지 못해 고민하던 사토코(나가사쿠 히로미)와 기요카즈(이우라 아라타) 부부는 ‘베이비 바통’이라는 기관을 통해 아들 아사토를 입양한다. 그렇게 평화로운 나날을 꾸려가던 부부 앞에 아사토의 친모를 자처하는 히카리(마키타 아주)가 나타나면서 복잡한 상황이 고조되어간다. 쓰지무라 미즈키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아침이 온다>라는 원제처럼 햇살 속에 파묻힌 것 같은 순간들로 채워져 있다. 가와세 나오미는 누가 진짜 엄마인가와 같은 조건과 자격을 묻지 않는다. 감독이 주목하는 지점은 “아무리 어두운 밤이 이어져도 결국엔 찾아오는 새벽”이다. 혈연이 아니라도 유대를 통해 이어나갈 수 있는 교감의 순간을 쌓아나간다고 해도 좋겠다.
<트루 마더스>는 하나의 선형적인 흐름보다 사토코와 히카리의 입장에서 각기 다른 시간들을 담아낸다. 그 와중에 특징적인 연출 중 하나가 히로시마의 베이비 바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가와세 나오미 영화 중에서도 드물게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연출을 사용하기도 했다. “촬영 전 실제로 비영리법인인 ‘BABY POCKET’에 대한 취재를 많이 했는데 그들 대부분 취재 카메라 앞에서 펑펑 울었다. 그들이 영화에 나오는 것이 어렵다면 <트루 마더스>의 배우들 곁으로 나라는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 현실을 찍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은 다큐멘터리 안에서 리얼함을 이끌어낸다는 의미에서 그 베이비 바통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중심이다.” 가와세 나오미는 기자회견을 통해 여러 차례 시간의 의미를 강조했다. “영화론 비슷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자기 안의 시간이다. 시간은 모든 사람들 안에 각각 존재한다.” 가와세 나오미는 각기 다른 시간의 연결을 위해 빛과 바람, 햇살 등 자연의 요소들을 활용한다. 이것은 감독이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화두다. 픽션과 다큐, 현실의 경계를 넘어 어떻게 교감할 수 있을까. 결국 연출이란 각자의 세계가 실감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궁리한 결과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분단되고 상대를 부정하기 쉬운 시대지만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공유해가는 체험들이 이어지길 소망한다.”
어쩌면 단절은 갑자기 닥친 사고가 아니라 꾸준히 지속된 현상이다. 코로나19는 그 속도를 가속시켰을 뿐 인류의 본질적인 속성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리 아이작 정 감독의 <미나리> 역시 경계를 넘는 소통에의 의지로 읽을 수 있는 영화 중 한편이다. 희망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한국계 이민 1세대의 사연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2020년 선댄스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제이콥(스티브 연)과 모니카(한예리) 부부는 모종의 사연으로 도시 적응에 실패하고 아칸소 시골 마을에서 새 삶을 꾸리고자 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점차 커뮤니티로부터 고립되어가는 이들이 기댈 것은 가족뿐이지만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자 약속했던 가족 안에서도 균열은 발견된다.
<미나리>는 감독의 개인적이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여러 보편적인 기억들을 녹여내 보편적인 공감의 통로를 발견해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큰 틀은 부부의 갈등, 한국에서 건너온 할머니와 낯선 손자의 교감을 따라가지만 도달하는 것은 결국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사회에서 거부되고 소외된 이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면서도 새로운 관계를 찾아내고 이어나가는 모습은 적지 않은 울림을 안긴다.
“이것은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내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결국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언어적인 장벽, 물리적인 장벽은 물론이고 세대간의 벽을 넘을 수 있는 힘. 그것이 우리가 영화를 찍고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유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스티브 연의 통찰은 비단 이 영화 한편에 국한되지 않는다. 갈라 프레젠테이션 상영작인 <트루 마더스> <미나리> <스파이의 아내>, 폐막작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 4차례 기자회견에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단절을 넘어서는 교감의 통로로서의 영화의 역할을 강조했다. 어쩌면 새삼스러운 질문들. 영화는 사람들을 연결시킬 수 있을까. 질문을 살짝 비틀어, ‘사람들을 잇는 매개체로서 영화만이 가진 주요한 속성이 있는가’라고 물어도 좋겠다. 스트리밍으로 서비스되는 수많은 영상 콘텐츠들과 영화제라는 장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영화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아니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차이를 만들고자 하는 건 단지 영화의 욕망인 것은 아닌지, 앞으로의 영화제들은 이 질문에 답을 내어놓아야만 한다. 스스로의 필요와 존재 근거에 대한 화답. 올해 부산영화제가 보여주고 증명하고자 한 것은 바로 그 가치와 의의일 것이다.
4일차
극장이라는 공간: 기억과 장소
때로 우리는 공간을 통해 기억을 갱신한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기억은 개인과 공간 사이, 관계 안에 쌓인다. 코로나19 이후 시간이 유독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우리의 몸이 공간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영화를 여타 영상물들과 구분지어주는 물리적인 조건은 딱 두 가지다. 하나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제약, 다른 하나는 러닝타임이라는 시간의 제약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주목해야 마땅한 세편의 영화가 있다. 영화제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매우 긴 러닝타임의 영화들이다. C.W. 원터와 안더스 에드스트롬 감독이 공동 연출한 <일과 나날(시오타니 계곡의 시오지리 다요코의)>이 480분, 하라 가즈오 감독의 <미나마타 만다라>가 372분,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시티홀>이 275분으로, 인디플러스관에서 상영되는 세편의 영화들은 그 압도적인 길이 때문에 하루 종일 극장을 점령해야만 했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이것은 최상의 관람 환경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종의 믿음이나 종교적 제의에 가까운 행위다. 오늘날 극장이라는 공간은 영화라는 매체에 있어 어디까지 필수적인 요소인가. 영화제라는 축제의 장은 근본적으로 그 지점을 되묻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25회 부산영화제는 영화의 전통과 의식을 고수하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중이다.
인디플러스관에서 상영된 세편의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영화마다 9명뿐이다. 우리는 되물을 수 있다. 9명의 관람을 집단 체험, 단체 관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정도 숫자가 얼마나 유효한가. 오히려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집착이 영화의 확장 가능성을 막고 있는 건 아닌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숫자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런 논리라면 올해 부산영화제를 찾을 1만명의 관객도 무의미하다. 부산영화제가 세편의 영화에 하루를 할애한다는 건 1만명의 관객과 9명의 관객을 동일 선상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영화의 축제라는 우주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편의 영화와 한명의 관객뿐이다. 세편의 영화를 (그것도 영화의 일부분을) 온라인으로 관람한 나는 극장에서이 영화를 만난 9명의 시간에 대해 감히 짐작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았지만 한편으론 다른 영화를 체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화를 만난다는 것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만나는지, 만남의 장소와 시간에 강하게 결속되는 체험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영화와의 만남은 일회적이고 유일하다. 만약 당신이 이미 봤던 영화를 다시 본다 해도, 그것은 사실상 다른 영화를 새롭게 만난 것이나 진배없다.
어떤 영화를 보여주는가만큼 중요한 명제는 이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달렸다. 혹은 어떤 식으로 만남의 공간을 제공할 것인가. 올해 부산영화제는 오프라인 상영이라는 기둥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선보였다. 오프라인의 미흡한 부분을 받쳐주는 온라인 GV, ‘리액션 시네마’라는 컨셉에 맞춰 지역성을 부각한 커뮤니티 비프,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2020 포럼 비프의 심도 깊은 토론들 역시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가능성으로서의 길을 제시했다. 이것은 단순히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며 영화제 이외의 대체재를 찾기 위한 고민도 아니다.
나는 여기 부산에서 각기 다른 시간을 걸어왔고, 다른 역사와 목적으로 가진 영화들이 단절을 잇고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을 목격한다. 아마도 시대정신이라고 부를 만한 흐름과 무의식들이 지금 여기, 부산영화제라는 시공간에 모여 있다. 한편의 영화, 한명의 관객. 단 한번의 만남. 그들이 모여 이룬 (영화의전당이라는) 창백하고 푸른 점. “여기가 영화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영화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영화들, 당신이 들어봤을 영화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영화들이 이곳에 살았고, 살고 있으며, 계속해서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