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부산은 영화와 함께④] “사회 안에 머물면서도 강인한 여성 부각시키고 싶었다”
2020-11-12
글 : 송경원
'스파이의 아내' 기자회견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박선영 프로그래머(왼쪽),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오른쪽).

구로사와 기요시가 연출한 첫 번째 시대극. 구로사와 영화 중에서도 눈에 띄게 엔터테인먼트적인 영화. 일본의 과거사를 외면하지 않고 응시하는 목소리. 좋은 영화가 으레 그러하듯 <스파이의 아내>는 여러 층위에서 접근할 수 있는, 결이 두터운 영화다. 그만큼 누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여러 해석과 감상이 이어질 수 있다. 10월26일 진행된 온라인 기자회견에서는 주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어두운 면을 다룬 성찰적인 면모에 대해 집중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반복되는 질문에도 성실하고 신중하게 답변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거장의 단단한 심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논쟁적인 소재, 오락적인 일면에 눈길이 먼저 가지만 일본 고전영화를 향한 존경과 애정으로 담금질한 정제된 장면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정수라 할 만하다. 여기 <스파이의 아내>를 향한 단서들을 전한다.

-<스파이의 아내>는 당신의 첫 번째 시대극이다.

=영화의 배경인 1940년의 일본은 위험하고 위태로웠다. 알다시피 일본은 과거 만주와 한반도를 포함해 여러 지역을 침공했다. 하지만 일본 국내를 기준으로 보자면, 1940년 이전은 자유와 평화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그러다 1940년이 되면서 비로소 국내에도 전쟁의 기운이 밀어닥치기 시작한다. <스파이의 아내>는 그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한쌍의 부부에 대한 이야기다.

-시대극의 매력이 무엇인가. 해보고 싶었음에도 그동안 시대극에 도전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다면.

=지금까지는 현대, 그것도 주로 도쿄를 무대로 했다. 현대극의 경우 최종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해 단정하거나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결말도 열어둔다. 반면 시대극은 역사이기 때문에 사실을 기반으로 한 과거에 대한 판단을 근거로 옳고 그름에 대한 나름의 확신을 가지고 그릴 수 있다. 시대극은 물리적으로 제약이 많은 편이다. 예전 촬영소 시대였으면 모를까 지금은 세트를 짓기도 힘들다. 오히려 그래서 한정된 시간과 예산 안에서 얼마나 해낼 수 있을까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역시나 1940년의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장소를 찾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행스러웠던 건 캐스팅이 내가 원하는 대로 거의 완벽히 이뤄졌다는 점이다.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 관동군 731부대 등 과거사를 반성적으로 그리고 있다. 일본 내 양심적 목소리로 봐도 될까.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쁜 일이지만 스스로 은폐된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목표를 세우진 않았다. 그저 세계적으로도 이미 알려진 사실에 의거해 성실히 그리고자 했을 따름이다. 물론 최근 몇년 사이에 이와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는 거의 없었던 게 사실이다. 나름 각오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용기를 낸 건 아니다. 왜곡하지 않고 사실에 바탕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식이었다. 그보다 신경 쓴 것은 이것이 역사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엔터테인먼트적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시대적 배경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서스펜스와 멜로를 어떻게 성립시킬 수 있을 것인가.

-<NHK> 드라마로 방영되었고 최근 영화도 개봉했다. 일본 내 반응은 어떤가.

=6월에 방영되긴 했지만 본 사람이 그렇게 많진 않을 것이다. 드라마로는 드물게 8K 카메라로 촬영을 했는데 일반 가정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포맷이기 때문이다. 10월부터 일본 극장에서도 개봉했는데 시대극을 쉽게 볼 수 없었던 상황이라 신선하다는 반응이 있다. 다만 일본에선 현재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선풍적인 인기라 주목도가 그리 높진 않은 편이다.

-반면 세계적으론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은사자상은 감독상이라고 부르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현장에서 연출하는 장면은 아무도 못 보지 않았나. (웃음) 완성된 작품을 보고 준 상이니 감독에게 주는 게 아니라 영화에 참여한 모든 스탭들에게 주는 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스파이가 아닌 스파이의 아내에 집중한 이유가 있나.

=하마구치 류스케와 노하라 다다시가 쓴 각본을 보고 중간부터 참가했다. 두 사람 모두 도쿄예술대학에서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이기도 하다. 이번 각본을 보고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느꼈다. 무역상인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보다는 그의 아내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당시 일반인의 인식, 고민, 일상을 더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아내가 주인공이면 미스터리한 남편의 행적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스펜스로 나아갈 수도 있다.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사랑 앞에 흔들리고 때로는 맹신한다는 점에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아사코>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와의 작업은 어땠는지.

=<아사코>의 주인공과 유사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하마구치도 그걸 의식하진 않았을 거다. 다만 자연스럽게 그의 개성이 드러났을 순 있다. 가령 나는 사랑으로 인해 흔들리는 여성을 절대 못 그린다. 내가 잘 그릴 수 있는 건 유령을 보고 무서워하는 여자, 살인귀를 피해 도망치는 여성이다. (웃음) 덧붙이자면 대본 작업에서 내 역할을 도려내고 줄이고 압축적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원래 대본에는 대사가 엄청 많았다. 그대로 찍었으면 세 시간도 넘었을 거다.

-사건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건 남편인 유사쿠다. 사토코는 계획의 일부에 불과한데.

=물론 전체적으로는 남편이 만들어놓은 장치 안에서 아내가 이용당하는 구도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곤 생각지 않는다. 유사쿠는 자신의 정의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의 정의와 사회의 요구가 충돌할 때 바깥으로 탈출하려고 한다. 반면 사토코는 정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애정, 즐거움, 행복 등 좀더 복잡한 면모가 행동을 결정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일본 사회 안에 머물면서 행동한다. 사회의 압력을 마주했을 때 남성들의 행동은 둘 중 하나다. 패배하여 굴복하거나 튕겨져 나가거나. 하지만 사토코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그 안에서 길을 모색한다. 사회 안에 머무르면서도 자신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부각시키고 싶었다.

-사토코 역의 아오이 유우가 특히 빛나는 장면을 꼽는다면.

=사토코가 조카를 찾아 여관을 방문하는 장면은 인물의 분기점 중 하나다. 조카에게 건네받은 문서 안에는 운명을 가를 중요한 국가기밀이 들어 있다. 이 단계에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음에도 아오이 유우는 눈빛과 표정으로 강인함을 표현한다. 스토리상으론 아무것도 아닌 장면일 수 있지만 매우 중요한 순간이고 그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영리한 배우다. 사실 영화 속 대사는 모두 40, 50년대 일본 고전영화에서 나올 법한 말투를 쓰고 있는데 다카하시 잇세이, 아오이 유우 모두 이미 충분히 공부가 되어 있는 상태라 따로 연습할 필요가 없었다. 준비된 배우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폭격으로 붕괴되는 정신병원 건물을 빠져나와 해변가로 나아가는 사토코의 모습은 유독 비장하고 직접적이다. 사토코의 절규와 울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 이유가 무엇인가.

=흥미로운 질문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서스펜스 멜로드라마다. 동시에 이건 전쟁이라는 무거운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시대극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장르영화로만 접근했다면 아마도 유사쿠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마무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극으로서 어떻게 결착할지의 문제에 있어서 내게도 정답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거리를 마주한 인물의 심정을 상상해보는 것이었다. 그저 한껏 울부짖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만 그 뒤에 자막으로 후일담을 전해 그 울부짖음으로부터 그녀를 어느 정도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작은 희망을 곁들였다고 해도 좋겠다.

사진제공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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