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디즈니와 픽사의 장점을 결합한 신작 <소울>이 ‘태어나기 전 세상’을 체험하게 하는 이유
2021-01-20
글 : 송경원
애니메이션이 꾸는 꿈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가장 멋진 묘비명(그런 순위가 존재한다면)을 떠올릴 때 첫손가락에 꼽힐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분명 오해받고 있다. 새해가 되면 멋진 문구를 내걸고 건설적인 미래를 위해 열심히 행동하겠다는 다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럴 때면 약속이나 한 듯 버나드 쇼의 묘비명도 별책부록마냥 딸려오는데, 다들 이 말을 두고 그러니까 후회하기 전에 망설이지 말고 당장 열정을 불태우라는 독려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내 귀엔 이 말이 그저 솔직한 고백과 자기 성찰, 그리고 괜찮다는 위로로 다가온다. 아마도 버나드 쇼가 무덤에서 일어나 다시 삶을 산다고 해도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또 한번 우물쭈물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망설임과 멍때림이야말로 삶의 본질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본질이 거창하다면 허락 정도로 해두자.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좋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삶. 물론 더 나은 무언가가 아닌 현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을 먹기까진 적지 않은 용기가 필요하다. 디즈니·픽사의 신작 <소울>은 ‘태어나기 전 세상’을 체험한 한 재즈 뮤지션의 일화를 통해 진짜 나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이끈다.

지금은 한몸이 되었지만 디즈니와 픽사의 색은 확실히 달랐다. 이건 우열의 문제라기보단 해석의 차이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문구를 두고 이루지 못한 꿈과 열정의 문제로 해석하는 건 디즈니의 방식이다. 디즈니 스토리텔링은 논리, 합리, 성취의 이상적인 구현이다. 주인공은 시련을 당하고 기회를 얻어 악을 타도한 후 성장하고 성공한다. 해피엔딩과 성장이라는 목적 지향의 스토리텔링이라고 해도 좋겠다. 픽사는 다르다. 픽사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관찰과 공감이다. 사건의 결과를 향해 나아간다기 보다는 인물의 특성을 파악해 이유를 더듬어가는 쪽에 가깝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문구를 보고 어떻게, 어쩌다가 우물쭈물하게 됐을까를 궁금해하고 상상하는 것이 픽사의 방식이다. 결과(현상)를 먼저 제시하고 원인을 탐구해 들어가는 쪽인 셈인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상식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소울>에서는 꿈과 열정에 대해서 다시 보기를 시도한다.

디즈니·픽사가 꿈을 말하는 방식

꿈과 열정은 소중하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야말로 우리를 내일로 이끌고 성장시키는 동력이다. 하지만 때로 그 가치가 다소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먼 미래의 꿈을 향해 초점을 맞추다보면 종종 발밑에 놓인 소중한 것들, 길가에 핀 들꽃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처럼. <소울>은 전문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중학교 밴드부 지도교사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를 통해 진짜 나를 바라보는 방식을 새삼 일깨운다. 조 가드너는 재즈를 사랑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재즈에 흠뻑 매료된 남자다. 처음에는 재즈에 흥미를 못 느꼈지만 재즈를 사랑하게 된 이후부터는 꾸준히 재즈 연주자가 되어 무대에 서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조는 생계를 위해 중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오디션을 보러 다니고 있다. 학교에서의 평판은 나쁘지 않아 정규직 교사를 제안받고 기뻐하는 어머니와 달리 정작 당사자인 조는 시큰둥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를 졸업하고 연주자로 일하고 있는 제자의 주선으로 재즈 뮤지션들의 꿈인 하프 노트 클럽에 초대된다. 존경해 마지않는 재즈 뮤지션 도로시아(안젤라 바셋) 앞에서 무아지경의 연주를 펼친 조는 마침내 대타 연주 기회를 얻는다. 뛸 듯한 기쁨도 잠시 행복에 겨워 뉴욕 시내를 걷던 조는 그만 발을 잘못 디뎌 맨홀 구멍에 빠져 죽는다. 조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향하고, 비로소 <소울>의 진짜 모험이 시작된다.

<소울>은 제목 그대로 영혼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소울>은 여러 의미를 지니는데 1차적으로는 태어나기 전 세상의 영혼이자 등장인물들이 간절히 바라는 꿈이며 재즈 음악이 담고 있는 정서를 대표하기도 한다. 피트 닥터 감독은 전작 <인사이드 아웃>에서처럼 자신의 아이들을 관찰하다가 ‘태어나기 전 세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제는 23살 된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그게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해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태어나기 전 세상’은 사후 세계가 아니라 이승으로 가기 전 새로운 영혼들이 고유한 성격과 개성을 부여받는 장소다.

실로 픽사다운 발상의 전환인데 핵심만 요약하자면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기’라고 할 수 있다. 장난감들의 세계를 엿봤던 <토이 스토리>처럼 사후 세계에 대한 기존 인식을 최대한 활용하되 살짝만 비틀어 전에 없던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2006년 디즈니와 픽사가 합병된 후에도 사실 한동안 두 회사는 한 지붕 두 가족마냥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그런데 디즈니가 <주먹왕 랄프>(2012), <주토피아>(2016) 등을 통해 점점 픽사의 특질을 배워가더니, 반대로 픽사는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처럼 디즈니스러운 결과물을 내놓는 등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하여 최근 <코코>(2017)나 이번 신작 <소울>에서는 마침내 두 회사가 거의 한몸이 되었음을 실감한다. 디즈니와 픽사가 서로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은 <소울> 속 두 주인공, 조와 영혼 22(티나 페이)의 관계를 닮았다.

나를 나답게 하기 위한 여정

영혼이 된 조는 어렵게 잡은 재즈 연주 기회를 포기하기 못하고 다시 지구로 돌아가고자 한다. 발버둥치던 조는 전생이 깨끗이 지워지기 전에 우연히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떨어진다. 마치 솜털 구름 위에 올라와 있는 곳같은 그곳에선 순수한 아기 영혼들을 위한 ‘유 세미나’가 한창이다. ‘유 세미나’란 아기 영혼들이 성격 파빌리온에서 적절한 개성을 부여받을 수 있게 돕는 곳으로 영혼 세계의 관리자인 ‘제리’들이 운영하고 있다. 유 세미나에선 아기 영혼을 돕는 멘토 시스템을 운영 중인데, 조는 카운슬러로 위장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오랜 세월 환생을 거부하고 있는 조숙한 영혼 22를 담당하게 된다. 22는 에이브러햄 링컨, 마하트마 간디, 아리스토텔레스 등 유명 위인들을 골탕먹이고 좌절시킨 문제아다. 태어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22는 ‘당신의 전당’에서 조의 실패한 기억을 보고 흥미를 느끼고 조를 돕기로 한다. 지구로 가는 통행권을 발급받으면 넘기기로 한 것이다. 열정에 불타는 조와 열정만 없는 아기 영혼의 유쾌한 동행은 이미 어디선가 본 것마냥 안정적이다.

<소울>의 스토리 라인은 실은 전형적인 디즈니 스토리텔링의 구성에 기반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많은 이야기들이 걸었던 왕도를 따른다. 두개의 세계가 있고, 각자의 세계에서 실패를 경험한 (혹은 주변인 취급을 받는)이들이 만나 교감을 나누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디즈니의 대표작인 <라이온 킹>(1994)과 비교해보자. <라이온 킹>에도 두 세계가 있다. 하나는 사자들이 다스리는 프라이드 록의 세계, 다른 하나는 지배자가 없는 하쿠나 마타타의 세계다. <라이온 킹>은 삼촌 스카의 음모로 프라이드 록에서 쫓겨났던 심바가 하쿠나 마타타에 머물다가 다시 프라이드 록으로 되돌아가 응당 자신에게 주어졌어야 할 운명을 차지하는 이야기다.

<소울>에도 두 세계가 있다. 조가 속한 현실 세계의 뉴욕과 22가 속한 ‘태어나기 전 세상’. 비교적 초반 영혼들의 세계로 넘어간 덕분에 얼핏 단테의 <신곡>처럼 사후 세계의 다채로운 공간을 무대로 할 것처럼 보이지만 디즈니·픽사의 진가는 그다음부터 발휘된다. 우여곡절 끝에 두 영혼이 다시 뉴욕 한복판에 떨어지고 관객은 전혀 예상치 못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다. 디즈니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과정을 ‘왕의 귀환’으로 다룰 때 픽사는 ‘인식의 확장’에 주목한다. 조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어 하프 노트 무대에 서길 고대하고, 22는 영원히 환생하지 않길 원한다. 각자의 소망이 이뤄진 후 영화가 끝나면 해피엔딩일까.

<소울>은 그토록 염원하던 무대가 끝나고, 꿈이 이뤄지고 난 뒤를 상상하고 고민한다. 그렇게 디즈니가 목적을 성취하고 갈등을 해결할 때 픽사는 잠깐 멈추고 다시 묻는다. 그게 진짜 당신이 바라는 거냐고. <소울>은 잠시 다른 세계를 체험하고 온 경험을 바탕으로 본래의 세계에서 우리가 놓치고 갔을지 모를 일상의 순간을 주워 담아 ‘다시보기’를 시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에 깃든 네 번째 ‘소울’은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진짜 나를 돌아보고 인정하기 위해 필요한 용기를 쌓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삶의 지혜를 담은 조언은 주변에 차고 넘친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와닿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 말이 얼마나 타당하고 현명한지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적절하게 당도하는지 방식이 중요하다. <소울>의 메시지나 스토리도 마찬가지다. 꿈과 열정만큼 현재가 중요하니 삶의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교양서적 한 코너에 이미 수북이 쌓여 있을 당연하고 바르고 따뜻한 이야기들이다. 조의 사연에 빗대면 재즈를 수단으로 삼지 말고 왜 자신이 재즈를 그토록 사랑했는지를 되돌아보라는 작은 토닥임. 즉흥 연주로 유일무이한 순간을 창조해내는 재즈 그 자체를 옮겨놓은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이 모든 ‘순간들’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비결은 실로 무아지경이라고 해도 좋을 애니메이션의 특질로부터 비롯된다. 상상한 것을 무엇이든 이미지화할 수 있는, 언어를 초과하는 애니메이션의 마법이라고 해도 좋겠다.

애니메이션을 애니메이션답게 만드는 상상력

픽사에는 유명한 철칙이 있다. “예술은 기술에 도전하고 기술은 예술에 영감을 준다.” 디즈니·픽사 책임애니메이터 바비 포데스타는 <소울>의 영혼도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디즈니 실사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감독 존 파브로, 2019)이 증명했듯 현재 CG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은 실사를 넘어서는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다. <소울>도 마찬가지다. 뉴욕 거리의 풍경, 조와 22가 문득 ‘지금, 여기’를 깨닫는 순간 단풍나무 아래의 빛나는 햇살은 마치 실제로 눈가에 내리쬐는 듯 생생하다.

하지만 <소울>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더 생생하게’가 아니라 ‘더 단순하고 직관적’인 쪽에 방점을 찍고 있다. ‘태어나기 전 세계’의 모습이나 사후 세계를 관리하는 우주적 존재 제리와 테리의 캐릭터 디자인은 마치 카툰을 보는 것마냥 철저히 애니메이션적이다. 어쩌면 애초에 이 이야기는 문자화된 대본이 아니라 상상을 구현한 ‘그림’으로 창조된 세계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화가 곧 스토리가 되는 건 애니메이션의 오랜 꿈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전혀 새로운, 전에 없던 추상적인 이미지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양식화된 표현에 뿌리를 두고 관객과의 접점을 넓히되 오직 애니메이션으로만 가능한 것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상상력. 보편적인 공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전에 없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 이제는 디즈니와 한몸이 된 픽사의 진정한 저력은 그 균형점을 탁월하게 잡아낸다는 데 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가장 애니메이션적인 선택을 하는 디즈니·픽사는 이제 당신이 상상하고픈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경지에 이르렀다. 요약하자면 애니메이션을 애니메이션답게. 생각해보면 무언가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대부분 그러하다. 목적이나 수단으로서의 무언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즐기는 것. 그러니 조금쯤 우물쭈물해도, 괜찮다. 당신이 무언가와 사랑에 빠진 순간을 잊지 않는다면.

사진제공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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