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이 네편의 작품을 통해서 일관되게 다루어온 소재(주제)는 한마디로 ‘삼각관계의 심리학’이었다. 감독(작가) 홍상수는 그 보편적인 주제(어떤 의미에서는 상투적이기도 한)를 독특한 ‘형식미학’으로 창출해낸 자신만의 공간 속에 던져놓고 끊임없이 탐색하고 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중층적인 남녀 사이의 ‘삼각관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는 많은 ‘불륜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어떤 인물도 그 관계의 부도덕성에 대한 갈등이나 자의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자의식의 부재란 곧 ‘사회(제도)와 개인’간의 대결의식이 없음을 뜻한다. 이렇듯 제도와의 긴장을 상실한 인물들은 결국 홍상수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실험실’ 속의 모르모트와 같다. 다시 말하자면 홍상수의 영화공간은 결코 구체적인 ‘현실’이 아니라 추상화된 ‘실험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실험실의 주요한 공간적 표상이 그의 영화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등장하는 ‘술집’과 ‘여관’이다. 홍상수는 이 밀실적 공간에서 여과없이 나타나는 남녀의 심리를 ‘현미경’적 시선으로 포착한다.
홍상수 감독의 독특한 스타일(형식)은 이러한 주제(내용)에 대한 탐구와 관찰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의 스타일의 핵심적 특징으로 언급되는 ‘모서리 구도’와 ‘고정된 카메라’가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그는 공간(특히 그의 주요 서사 공간인 ‘술집’과 ‘여관’ 등의 실내 공간)을 이른바 ‘모서리 구도’로 불완전하게 포착하는데, 관객은 그 불완전한 ‘입체성’이 주는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 나머지 공간을 심리적으로 구성하려 노력하게 되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가 보여주는 공간 속으로 ‘유인(참여)’된다. 한편, 그 특유의 ‘카메라 위치와 고정성’은 한국 관객이 익숙해져 있는 시각적 체험 중의 하나인 ‘폐쇄회로 카메라’(몰래 카메라)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데, 그럼으로써 관객은 심리적으로 영화 내 공간으로 ‘유인’되어 들어가면서도 일정하게 ‘안전한’ 관찰의 거리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몰래 카메라의 시선(관음증적 시선)으로 끊임없이 내밀한 남녀관계를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말초적인 선정성(관음증의 충족)으로 빠져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 은밀한 남녀의 모습이 징그럽도록 솔직하고 대담하여(극적으로 꾸며지지 않아서) ‘그들’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이른바 ‘거울 효과’). 둘째, 그가 늘 새롭게 ‘창조’(발견)해내는 ‘내러티브 구성방식’ 때문이다. 그의 ‘내러티브 구성방식’의 특징은 전반부와 후반부의 2부 구성이다. 홍상수는 그 2부 구성 속에서 때로는 ‘시간을 해체’하는 방식으로(<강원도의 힘>과 <오! 수정>) 때로는 ‘정보의 불균등한 배분’의 방식으로(<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생활의 발견>) 일종의 ‘미스터리’ 효과(정성일씨의 표현에 따르면 ‘플래시백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관객에게 안락하고 편안한 관음증의 충족을 허용하지 않는 ‘지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작가 홍상수는 자신의 주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탐구해보려는 노력 속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형식미학’을 형성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미학’의 추구는 일반적인 ‘모더니즘’적 실천과는 일정하게 거리가 있다(근본적으로 그는 ‘내러티브의 해체’를 겨냥하고 있지 않으며, ‘자기 반영적’ 형식실험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홍상수’적이기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집의 성과는 분명 한국영화 전체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의 길을 고집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해온 ‘우리’에게도, 그의 시선이 지극히 사적이고 협소한 ‘삼각관계의 현상학’의 범위를 벗어나서 좀더 넓어지고 깊어질 것을 희망할 작은 권리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