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7] - 이론비평요지_<꽃섬>의 질서
2002-05-17
`없는-장소`로서의 유토피아

분절의 항목을 근거로 재배열의 행위를 자극하는 것은 이 세계에서 무엇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인식하기 위한 존재론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누도록 하고, 변환하게 하는 것은 인식을 구성하는 우리의 에피스테메, 즉 인식가능성의 조건이다. 관행적인 되풀이를 불안정하게 하고, 틈새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배열 집합들과는 전혀 다른 인식의 조건을 내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꽃섬>에서 달라 보이는 것은 언제나 다른 것이 아니다. 남편과 두식이 닮아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달라 보이는 것이 꽃섬의 질서에 의해서 같은 장력 위에 동일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표상한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동일자로부터 타자를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의심에 찬 질문이 들어 있다.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에 있어서 혜나 어머니의 친구, 박희진에 대한 오해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경우에 있다. 다른 것이 같을 수 있다면, 맞다고 생각했던 것은 틀릴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치판단을 내포한 인식이 인식주체-인식대상-인식결과 사이에서 혼선을 빚지 않고 완벽한 기대와 호응을 이루는 것은 천사친구에게서 뿐이다.

구원과 치유의 기적이 벌어지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꽃섬은 유토피아로 불릴 수가 없다. ‘없는-장소’로서의 유토-피아. 그 유토피아는 상상 속에, 혹은 염원 속에 존재하는 공간이며, 현실의 세계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공간이기에 끝없이 유보되며 꿈꿀 수 있는 여지를 얻는다. 그러나 옥남과 혜나와 유진은 현재형의 시간을 따라가며 끝끝내 꽃섬에 도착한다. 유토피아의 모습을 띤, 하지만 공상의 왕국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세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꽃섬. 현실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그 거대영역(바깥세계)과는 동떨어진 질서‘들’을 통해 숨쉬고 있는 곳. 그 장소에 대해 부여할 수 있는 이름은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가 될 것이다. 유진이 사라지는 장면, 여기에는 어떤 기술적 이펙트도 사용되지 않고 있다. 각각의 프레임 내부를 과잉의 이미지로 채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프레임 바깥에 놓여 있는 외화면 영역의 비가시성이 구원의 효과를 대신한다. 그 비가시적 외화면 영역이 꽃섬의 질서를 인식하는 또 하나의 영화적 조건이 된다.

아마도 섣부른 평가보다는 <꽃섬>의 판타지 양식이 어떤 인식틀의 전환에 근거하여 배열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이 더 생산적 접근이 될 것이다. 그 근거는 <꽃섬>을 전혀 다른 분류로 인식시키는 헤테로토피아적 질서이다. 판타지라는 큰 원에, 작은 원으로서의 다큐멘터리적 기법으로 찍힌 에피소드들이 내접한다는 것은, 현실적인 차원에서 비현실적인 효과를 담지하기 위한 전복적 과정이다. 이 영화의 판타지 양식은 그러므로, 현실 안에 있으면서도, 바깥세상과는 다른 질서로 작동하는, 그럼으로써 비현실적 장소로 기능하는 ‘꽃섬’의 역할과 같은 것이다. 그 점에서 송일곤의 <꽃섬>이 한국영화의 전통 안에서 의미를 갖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판타지 양식분류의 표에 예 하나를 덧붙였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혹, 더 깊이있게는 판타지에 대한 다른 인식조건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그 고정적인 인식조건들을 송일곤은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서로 겹친 관계로 옮겨보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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