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7회 <씨네21> 영화평론상 [3] - 정사헌 작품비평 전문 <메멘토>
2002-05-17
기억하라! 기억할 수 없음을

누아르를 계승해가는, 포스트누아르 또는 네오누아르라고 불릴 수 있는 진영 중에는 이런 두 가지 부류들이 속한다. <폐쇄구역>의 제임스 폴리처럼 외설적 아버지의 형상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악질 경찰>의 아벨 페라라처럼 존재론적인 것을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면서, 누아르의 주제에 닿아 있는 어느 하나를 심화시키는 부류와 <블루스틸>의 캐서린 비글로처럼 팜므파탈을 옴므파탈로 대체하고, <유주얼 서스펙트>의 크리스토퍼 매커리, 브라이언 싱어처럼 1인칭 보이스 오버의 회고를 거짓 내러티브로 뒤바꾸면서, 전체 누아르 컨벤션 중 일부를 변주하는 부류.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속할 것이다.

누아르 역사에 수없이 등장했던 직업인 보험수사관이 전직인 레너드, 그가 들려주는 1인칭 보이스 오버, 그의 기억손실증을 악용하는 팜므파탈로서의 나탈리, 그의 주위를 맴도는 정체불명의 사내 테드. <메멘토>는 누아르 형식 요소의 대부분을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이 영화는 앞시퀀스의 첫 장면이 뒷시퀀스의 마지막 장면과 이어지며, 결코 현재의 원점으로 돌아오지 않는 완전한 과거로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플래시백 구조를 이끄는 것은 주인공 레너드가 겪고 있는 기억상실증의 반복이다.

‘기억상실증’은 누아르에서 종종 등장하곤 하는 주제였다. 그것이 주요한 모티브가 되는 이유는 누아르의 주인공들이 처하는 상황들과 관계가 있다. 하드보일드 탐정들로 대표되는 누아르적 주인공들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건의 미로를 헤매며, 언제나 스스로가 생각했던 문제 그 이상의 것들을 접하게 된다. 유혹과 폭력의 세계로 빠져들어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잡히지 않는 진실이다. 그리고 진실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주체의 능력을 한계에 부딪히게 하는 외부의 거대한 구조를 느끼며 분열(나르시즘을 포함하여)의 늪에 빠진다. 그중에서도 기억상실은 주체의 의식과 정체성을 가시적으로 혼란에 빠뜨리는 누아르적 동기화이다.

앨런 파커가 80년대에 만들었던 <엔젤하트>는 그 혼란을 다룬다. 스스로가 살인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탐정(미키 루크)은 사이퍼에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라고 절규한다. <메멘토>의 첫 번째 시퀀스에서, 말하자면 시간상으로는 마지막 부분에서 죽기 직전의 테디가 레너드에게 ‘너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소리치는 것은 동일한 공명처럼 들린다. 반복적으로 기억을 상실하는 레너드는 굳건한 의식적 주체가 아닌 것이다. 그는 아내의 복수를 했는지도, 아내가 언제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착각하고 있다. 누아르적 불확정성의 세계는 기억을 상실한 주체의 불확실성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복수를 실행한 뒤에도 그 ‘사실’(fact)을 잊은 채, 여전히 또 다른 누군가를 쫓고 있는 레너드는, 잡히지 않는 허구적 대상을 욕망하는 빗금쳐진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억상실이라는 전통적인 테마를 다루면서도 변주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카이저 수제에 관한 신화화 내러티브가 그렇듯이, 레너드의 손등에 쓰여져 있는 ‘새미 젠키스를 기억하라’의 내러티브는 <메멘토>에서의 맥거핀이다. 그러므로 ‘기억하라’는 제목은 아이러니이다. 중요한 실마리는 레너드가 기억할 수 없는 자신을 이용하여 사실들을 왜곡하는 데 있다. 레너드는 테디의 사진 뒤에 믿지 말라고 쓰고, 차번호를 ‘사실’로 기록해놓는다. 그는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다시 추론을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고, 또 그 추론이 테디를 아내의 살인범 존 G로 만들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크리스토퍼 놀란이 변주해낸 한 부분이다. 기억은 15분을 기준으로 현존과 부재를 반복한다. 만약, 이미 지나버려 다시 겪을 수 없는 기억상실증이라면 레너드의 욕망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실은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기억하는 동안 레너드가 그 아무리 에르큘 포와르의 행세를 한다고 해도, 그 사실들의 조합이 이끄는 논리적 사고는 언제나 잘못된 추론에 도달하게 된다. 객관적 사실들은 증명의 힘을 잃고, 무의식은 의식을 덮친다. 이 영화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런 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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