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이라는 분야에 한정해 말한다면 심사라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그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지적 우열이 전제될 때 정당화된다. 다시 말해 심사하는 사람은 심사받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올해 제출된 70여편의 응모작 가운데 다수가 보여준 담대한 지적 모험의 성취도를 우리가 엄격하게 판정할 능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심사의 의미는, 우리가 찾는 것이 일반적으로 뛰어난 평론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뛰어난 평론이라는 데 있다. 그건 <씨네21> 평론상의 일관된 방침이기도 하다.
지난해에도 밝혔지만 우리는 이번에도 부드러움과 명료함, 그리고 영화사적 교양이라는 기준으로 응모작들을 선별했다. 전자의 기준은 평론이 대화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후자의 기준은 영화사적 교양과 그에 대한 존중이 우리 영화문화에서 가장 부족한 요소라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다. 두 가지 기준에서 볼 때, 올해의 응모작들은 늘어난 편수가 준 기대감엔 다소 못 미쳤다. 라캉과 들뢰즈의 용어를 개별 영화에 적용하려고 애쓴 글이 여전히 눈에 많이 띤 반면, 개별 영화를 영화사적 맥락에서 읽으려는 글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70여편 중에서 가렸고, 마지막까지 세편을 남겨놓고 고심했다.
당선작으로 뽑은 변성찬의 평론은 무엇보다 부드러운 문장의 미덕과 단단한 독해력이 돋보였다. <생활의 발견>을 홍상수적 문체의 이완으로 보는 그의 이론비평은 단정적인 어투를 피하고 특정한 이론을 원용하지 않으면서도, 홍상수의 영화가 놓인 자리를 명료하게 설득하고 있다(다만 미스터리 효과라는 단어로 포괄된 홍상수적 내러티브의 특별한 방식이 홍상수 영화의 미학적 잠재력을 축소하고 있다는 혐의는 토론돼야 할 과제라고 믿는다). <복수는 나의 것>에 관한 작품평에서도 이론비평에서의 미덕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마음 든든했다.
남은 두편 중에서 우수작을 뽑는 일이 힘들었다. 결국 뽑히지 못한 배경민의 비평은 매우 뛰어났다. <메멘토>를 중심으로 ‘기억의 영화’를 탐색하는 그의 이론비평은 분석의 힘이 쾌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사유를 풍성하게 해나간다기보다 일정한 사유의 틀에 개별 영화들을 끌어들인다는 혐의를 끝내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나비>에 관한 작품비평이 이론비평에 비해 허술한 것도 감점 요인이었다. 고민 끝에 정사헌의 비평을 우수작으로 뽑았다. <꽃섬>을 헤테로토피아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파악한 그의 이론비평은 다소 어지러운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참신하고 도전적이었으며, <메멘토>를 누아르 장르의 맥락에서 서술한 작품비평은 힘있고 명료했다.
응모한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우리의 무지와 편견 때문에 버려졌을지 모를 평을 써주신 분들께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