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은 유독 카메라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마치 정해진 일정 간격 안에서만 바라보라고 약속이라도 한 듯 피사체에 좀처럼 다가가지 않는다. 으레 등장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할 만한 상황이어도 규칙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듯 카메라는 관조의 태도를 고수한다. 부동의 시선과 롱테이크는 영화사에서 굳이 누군가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쉬이 목격해온 장치다. 또 카메라 시선의 주체를 탐구하는 일도 빼놓지 않고 이어져왔다. <여름날>이라면 가장 쉬운 짐작은 일상을 보내는 승희의 모습을 적당한 발치에서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를 죽은 승희 엄마로 보는 것일 테다.
어느 밤 조용히 윗옷을 갈아입는 승희를 지켜보던 카메라의 시선은 화면이 암전되면서 잠시 사라진 뒤 선풍기 바람을 쐬며 낮잠을 자는 승희를 쳐다보는 시선으로 되살아난다. 화면 안에는 열린 문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는 닭들이 승희 주변을 오가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주목하는 사람, 그러니까 승희 말고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카메라 앞을 지나가는 닭을 시선에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여기며 초점을 낭비하지 않는다. 유사한 장면이 고향에 내려온 승희가 친구 다은을 만날 때 반복된다. 한 무리의 사내들은 승희와 다은에게 합석해 술 한잔할 것을 권유한다. 내키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끼게 된 승희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들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고 있다. 승희만이 거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난감해한다. 이때 카메라는 늘 그러했듯 적당한 거리를 두고 이 장면을 목격해내고 있다. 카메라가 오가는 닭에게 큰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무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승희의 얼굴만을 어렵사리 포착한다.
카메라가 승희의 모습 외에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진실은 술자리 장면에서 정보들이 질서 없이 제시됨으로써 확정된다. 다은과 사내들의 대화는 서로 뒤섞여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물리며, 그들의 얼굴과 몸짓은 초점에서 벗어나버린다. 일반의 구도라면 흠집으로 치부할 만한 장면인데, 이 광경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에서는 승희를 수호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마저 느껴진다. 승희를 향한 끈질긴 관심과 끝없는 애정의 시선을 담지할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승희의 엄마를 제외하고는 떠올리기 쉽지 않다.
영화에 한번도 등장하지는 않지만 승희의 엄마는 승희가 고향에 내려간 이유와 가족들의 언급 등을 통해 끊임없이 그 존재가 마치 영화의 배경처럼 환기된다는 정황을 보자면, 카메라 시선의 주체는 승희 엄마 말고는 마땅히 없어 보인다. 그러니 이 장면들을 포함하여 승희가 낚시터에서 처음 거제 청년을 만날 때, 산을 올라 폐왕성에 다다르기까지, 청년과 회를 먹거나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을 때, 또 외숙모와 할머니, 그리고 승희만 단독으로 화면에 잡히는 장면들에서 카메라 시선의 주체는 승희 엄마로서 그들에게 온정이 넘치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카메라 시선의 주인공을 모두 승희 엄마로 단정하기는 섣부르다. 우선 카메라 시선의 주체가 온전하게 기계적 실체인 카메라 자체일 때가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몇몇 장면들은 주체가 부재해 기계적 실체로서 카메라의 시선만이 느껴진다. 이 장면들은 시선의 주체를 확보한 장면들과 비교할 때 그 존재가 드러난다. 등장인물을 응시하지 않고 풍경을 주시하는 순간들이 대개 그렇다. 이때는 시선의 주체가 불분명하며 주체의 자리는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다는 듯이 텅 빈 것만 같아 공허함이 밀려온다.
그렇다면 주체가 확인된 장면들은 어떠한가. 죽음에 가까워진 승희의 할머니는 카메라 자체의 시선으로, 또는 잠시 카메라의 시선을 빌린 승희의 시선을 통해 침대에 누운 채 뒷머리로만 드러난다. 이후 할머니가 죽은 뒤 카메라의 시선은 누워 있던 할머니쪽의 위치에서 승희를 바라본다. 이 시선은 지금껏 할머니를 바라보던 시선의 방향성을 상기할 때 생경하다. 다시 말해 전도된 시선의 방향을 바탕으로 카메라 시선의 주체를 죽은 할머니로 상정해도 무방할 테다. 할머니는 침대에 누운 승희를 덤덤히 바라보는 중이다.
또 카메라 시선은 청년의 것이 되기도 한다. 우연한 만남으로 승희와 짧은 우정을 맺었던 청년은 몇번의 만남 뒤로 사라진다. 그가 사라진 것을 두고 꼭 그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순 없겠지만, 중요한 건 그의 부재 이후 카메라 시선의 주체가 청년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는 점이다. 청년의 퇴근길이라 짐작한 곳에서 청년과 마주치려고 기다려보지만 만나지 못하는 승희를 담은 장면과, 이번에는 청년 없이 홀로 산을 올라 폐왕성에 도착해 바다를 바라보는 승희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장면에서, 청년은 없지만 오히려 그의 부재는 승희 엄마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존재를 강하게 환기한다. 더하여 이렇게 말해도 될 법하다. 이 장면에서 존재가 환기되는 사람은 청년으로 시작해 죽은 할머니, 그리고 승희 엄마까지 그 수가 점점 더 늘어난다고 말이다.
그들을 카메라의 자리로 불러낸 건 다름 아닌 승희 자신일 것이다. 영화에서 승희가 그들을 그리워하거나 필요로 한다고 해서 직접 호명하는 일은 없다. 다만 앞서 승희 엄마의 부재가 부각되는 동안, 할머니의 빈자리를 승희 스스로 채우면서 상실감을 느끼는 사이, 그리고 다시 만나고 싶었던 청년을 마주치지 못하는 때, 승희뿐 아니라 관객도 지금 막 부재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다시 말해 카메라 시선의 주인공은 승희가 보낸 암묵적 호출의 당사자에 따라 변경되는 것이다. 불려온 그들은 승희의 바람만큼이나 승희를 아끼는 마음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빌려 응원을 담은 응시를 승희에게 보내주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직접 영향을 끼치는 일 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승희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끝났지만 승희도 언젠가 저 카메라 시선의 주인공이 되리라 믿는다. 돌아보면 카메라 시선의 몫은 모두 부재한 자들에게 돌아갔다. 유한한 존재인 승희도 언젠가는 부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승희도 카메라 시선의 주인공이 될 자격은 충분하다. <여름날>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무언가 무한한 안녕을 선사한다고 한다면 그건 특수성이 제거된 보편성만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위계나 질서가 없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시선의 자리이기에 편안하다. <여름날>이 잔잔한 낙원의 세계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언젠가 승희도 저 평등한 자리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누군가의 부름에 귀 기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