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사건과 그 이후는 어떻게 서로 긴장을 유지하며 대립할까.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의 <그녀의 조각들>은 중대한 사건과 그 후의 시간이 흘러가는 방식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20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가정 출산의 과정을 묘사한 본편의 과감한 시도는 일찍이 알려진 바다. 이 장면은 롱테이크의 전형적인 기능대로 상황의 사실성을 충실히 견인하는 동시에, 출산이라는 행위가 지닌 격렬함과 긴박함을 극적으로 고양하며 관객의 숨까지 붙잡는다.
이음새 없는(seamless) 하나의 흐름으로 조직된 롱테이크가 활성화하는 것은 단연 체험의 파토스다. 그런데 체험이란 사건의 감각은 극대화하지만, 정연하게 정돈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관객에게 더욱 세밀한 감상을 요청하는 부분은 오히려 이 롱테이크 이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이 롱테이크 직후 등장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이제 관객은 앞선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남아 있음을 상기하게 되고, 이 비극 이후를 살아가는 마사의 일상을 따라가야 한다.
맨 처음 영화는 ‘9월17일’이라는 자막과 함께 현수교의 재건설 공사현장에서 시작되었다. 이 날짜는 그 사건 이후에도 숫자를 달리하며 다리 위에 무심하게 떠오른다. ‘10월9일’, ‘12월21일’, ‘3월22일’…. 그야말로 띄엄띄엄, 토막토막, 특정한 간격의 기준을 찾을 수 없이 그저 무의미한 숫자들로 간신히 지탱되는 파편화된 일상이다. 각 날짜의 사이를 잃어버린, 그래서 매끄럽게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는 일상. 마사는 지금 이것을 통과하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파편화된 시간과 함께, 공사가 진행되면서 점차 가까워지고 있는 다리의 양쪽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조각난’ 시간은 미약하게나마 어떤 연결의 기미를 희망해볼 단서를 전달하는 셈이기도 하다. 결국 <그녀의 조각들>은 극한의 체험이 요청하는 지속적인 시간과 그 이후의 파편화된 시간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이 둘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 같다. 자명하게도 지속과 단절은 서로의 존재를 등진 채 성립되지 않던가.
무엇보다 이 조각난 시간 안에서 영화가 구동되는 방식 또한 들여다보아야 한다. 영화는 아기의 시신을 처리하는 문제, 조산사를 둘러싼 여론의 비난, 그녀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 등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것들을 요약하자면 결국 마사와 다른 식구들이 충돌하는 과정이다. 마사는 이제 남편 숀을 신뢰하지 못하며, 엄마와 지독하게 대립한다. 마사에게 할당되는 장면들은 대개 상대방에 대한 리액션으로 유지되며, 그래서 관객이 마사의 내면을 제대로 헤아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영화란 인물의 번민까지 상세히 서술할 재간은 딱히 없는 매체이므로, <그녀의 조각들>은 마사의 속을 성급히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그녀의 신체 부위 곳곳을 가까이서 담아내기를 시도함으로써 조각난 시간을 표상하는 새로운 접근방식과 의미를 산출해낸다. 요컨대 환희와 절망을 오간 그날의 기억을 사후적으로 가장 생생히 담당하고 있는 표지는 마사의 몸 자체다.
생각해보면 출산이란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이 나오는 것이다. 함께하던 것이 떨어져 나가고, 기어코 하나에서 둘로 분리되는 것. 물론 귀중한 탄생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산모에게는 신체의 일부가 탈락하는 상실의 순간이기도 하다(그리고 마사는 실제로 아기를 잃었다). 이 점에서 영화의 제목(‘그녀의 조각들’)은 사건 이후 마사가 버텨야 하는 괴로운 일상의 파편들을 일컫는 동시에, 물리적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 뼛가루가 된, 아기의 가여운 몸을 가리키기도 할 것이다.
카메라는 파편화된 시간의 사이로 조각난 몸의 형상을 진열함으로써 그날의 부스러기들을 그러모은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때 가만히 둔 발,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거나 담뱃불을 끄는 손, 스르르 바람이 빠지는 짐벌 위에서 미끄러지는 다리, 혹은 구체적인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의 옆모습, 그리고 마침내 기억을 더듬기 위해 애쓰는 목과 어깨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이 장면들은 얼핏 인서트 숏으로 보이지만 실은 아무런 서사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무용하고 잉여적인 장면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 않은 채로 이러한 장면들을 뭉텅뭉텅 흩뜨려놓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이 단속적인 시간을 살아가는 상황을 나타낼 핵심으로 여긴다.
<그녀의 조각들>이 더욱 용감한 영화인 것은 마사의 외로운 사정이 그녀를 잠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후반부, 법정에서 어렵사리 증언을 나선 마사는 변호사로부터 죽은 아기에 관한 질문 공세를 받는다. 아기를 안아봤는지, 아기의 체온은 어땠는지, 손발, 눈동자, 머리 색깔, 머리숱을 살펴봤는지. 사건은 경황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기억을 또렷이 되살리지 못한다. 이 장면들 사이로 카메라는 기어코 마사의 목과 어깨에 바짝 다가선 후 그녀가 기억해내야 할 것을 불러일으킨다. 잔잔한 심장박동 소리를 함께 삽입하는 것이다. 목과 어깨는 그녀가 마지막으로 아기를 안았을 때 그 숨결을 감각했던 장소였다. 이 조각난 신체의 이미지는 사운드와 결합하며 마사를 움직이는 기제가 된다.
재판이 휴정된 동안 마사는 사진관에 들러 오래전 숀이 찍어둔 사진을 확인한다. 현미경으로 관찰한 네거티브필름에는 신체 부위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곧장 인화를 요청한 그녀는 한장의 사진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자신과 아기의 모습을 목격한다. 돌이켜보면 사건 이후 몸과 몸이 완벽히 접촉하기란 어려운 사태였다. 마사와 숀은 섹스를 그르치고, 엄마가 화해의 제스처로 다가갈 때마다 마사는 사납게 회피하곤 했다. 그 실패들의 끝에서 마주하게 된, 서로의 몸을 꼭 붙잡은 두 인간 혹은 한몸의 사진은 마사가 자신과 타인을 위해 발화하도록 이끈다.
2차 증언에서 마사는 조산사의 무죄를 진술한다. 이때 마사와 엄마의 얼굴이 모두 정면을 바라본 채 숏-리버스 숏으로 진행된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듯 둘의 얼굴이 번갈아 맞붙는 이 장면의 감동은 무시하기 어렵다. <그녀의 조각들>은 마침내 앞을 보며 미소를 짓는 두 모녀의 장면을 연결함으로써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화해를 역설한다. 후반부, 세 모녀가 카페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엄마와 마사는 서로의 손을 맞잡는다. 클로즈업된 이 두손은 조각난 신체의 형상이 아니라, 조각과 조각이 만나 맞붙은 결합이자 연결의 이미지다. <그녀의 조각들>은 영화 내부가 설계한 형식을 강고하게 건축함으로써 마침내 접촉을 도모한다. “하나는 두배가 된 하나인 둘을 포함한 것이고, 둘은 반이 된 둘인 하나를 분할한 것”(메릴린 스트래선)이라는, 이 ‘부분적인 연결들’이 성사되는 과정을 근사하게 그려낸 본편의 시도가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