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리의 <블랙클랜스맨>과 샤카 킹의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서로 대당이면서 거울쌍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블랙클랜스맨>의 주요 서사는 백인 경찰이 백인우월주의집단 큐클럭스클랜(Ku Klux Klan, 이하 KKK)에 잠입해 발생하고,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이야기는 흑인 건달이 흑인인권운동단체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에 투입되면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전자의 이면에는 흑인이, 후자의 배후에는 백인이 있다는 설정 또한 두 영화를 번갈아 보게끔 만든다.
소수자의 권리투쟁을 주요 소재로 다루는 영화를 비평할 때 가장 안전한 선택지는 서사가 전달하는 교훈과 정치적 요구를 실어나르는 것일 테다. 남다은 평론가가 켄 로치의 영화에 관해 “우리는 누군가의 비평적 견해를 참조하기 위해 켄 로치의 작품론 혹은 작가론을 읽지 않는다. 그의 세계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은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영화의 논조에 분노나 죄의식으로 공감을 표하는 평자의 도덕성을 은근히 내세우곤 한다”(<필로> 14호, ‘세계의 끝, 운동하는 진실’)라고 적을 때 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건, 형식적 숙고보다 사회를 겨냥한 주문이 두드러지는 화면을 마주하면서도 매체로서의 ‘영화’를 도출해내야 하는 비평가의 진솔한 고민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데 대한 염려라고도 요약할 수 있을 텐데, 이렇듯 영화가 구축한 내적 질서보다 영화 밖에 곧장 대입해도 무리 없는 메시지가 더 돋보이는 ‘정치적’ 영화들 앞에서 우리는 자주 주춤거리게 된다.
이 글에서는 영화-예술이 지니는 정치성에 관해 구태여 소상히 읊지 않을 예정이며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는 어떤 이야기의 경우 그것을 소재로 선택하는 일부터 은연중에 정치가 된다는 사실, 혹은 정치성을 띠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가령 이런 가정. 멀티캐스팅을 앞세운 영화가 하나 있다고 치자. 우리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아직 접하지 못했다. 대신 주어진 정보라고는 단 한장의 포스터뿐이라고 할 때, 그 포스터에 무리를 지은 백인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고 한들 우리는 여전히 영화의 내용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인원으로 흑인들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것 같다. 소수자들이 군집해 있다는 정보에서 자연스럽게도 모종의 저항성과 반동성이 느껴지지 않을까. 이는 심지어 영화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관객에게 저절로 연상되는 감각이다.
백인들의 얼굴에서는 특정한 이야기를 상상하기가 어렵다. 이는 역으로 상상할 거리가 너무 풍부해서다. 반대로 흑인들의 얼굴에는 사회문화적 함의가 무의식적으로 동반된다. 이 복합적인 내력이 ‘흑인영화’, 즉 블랙무비에 본의 아니게 새겨진 가장 큰 특질이다. 거칠게 말하면 블랙무비와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이다(이는 최근 우리가 자주 호명해온 ‘여성영화’나 ‘퀴어영화’와도 큰 맥락에서 맞닿을 것이다). 이 진퇴양난의 자리에서 <블랙클랜스맨>과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를 살펴보는 건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영화는 이미 내재한 정치적 의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각자 착안한 형식을 통해 영화의 (불)가능성을 수행하는 작품들로 보인다.
두편은 명백히 블랙무비의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는 영화들이지만 흑인의 이야기를 다룰 때 자주 반복되는, 결집과 연대를 도모하는 운동의 방식이나 흑백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고통을 묘사하는 방식을 주조로 삼지는 않는다. 이는 중요한 전략인데, 소수자라서 겪는 삶을 지속적으로 ‘리얼’하게 가시화하는 작업은 물론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이 계속될 때 온건하고 안전한 시스템은 모습을 바꿔가며 고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블랙클랜스맨>과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무모하면서도 꼿꼿하게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한다.
위장의 모티프, 영화 만들기 또는 신화 가져오기
앞서 말했듯 <블랙클랜스맨>과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인물들은 신분을 위장하여 각각 KKK와 흑표당에 가입한다. 그런데 이들의 위장은 스파이라는 소재를 내세우는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두편에서 위장은 서사 내에서 매우 즉흥적이고 돌발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들의 위장이란 견고하고 정교한 체제하에 집행된 계획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충동적인 상황에 뒤따른 외삽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 ‘뜻밖의 위장’이라는 모티프가 두편이 본질적으로 드러내려는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는 발화점이 된다.
먼저 <블랙클랜스맨>에서 위장은 두번 진행된다. 처음에는 흑인 경찰 론이 흑인 운동가 콰메 투레의 연설회장에 들어가면서, 그다음은 영화의 후반부까지 주요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로서 백인 경찰 필립이 KKK에 잠입하면서다. 신입 경찰인 론이 청중 속 한명으로 연설회장에 참여할 때, 바깥에서 도청기를 통해 상황을 전해 듣는 것은 백인이자 경찰 선배들인 필립과 지미다. 그러나 이후, 론이 KKK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백인인 필립이 KKK에 들어가게 될 때, 이제는 론이 필립을 가르치게 된다. 론은 흑인 솔의 대가 제임스 브라운의 노래 가사를 낭독하며 필립에게 자신의 목소리와 말투를 따라하게 하고, 도청기를 통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점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KKK 단원들 사이에서 위험에 놓이게 되는 것도 필립이다.
영화에서 위장을 위해 판을 짜는 행위가 그리 낯선 모습은 아니며, 이는 명백히 영화 만들기의 알레고리로 읽힌다(이 영화 만들기란 <기생충>에서 기택의 식구들이 동익의 집으로 들어가며 펼치는 일련의 과정이 섬세하게 드러낸 바 있다). 상대편에 잠입한 ‘스파이’는 그쪽에 우호적으로 보일 만한 연기를 전달해야 하고, 그 배후에 있는 자는 상황을 파악하고 감독하는 연출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블랙클랜스맨>이 몇몇 유명한 영화들을 레퍼런스로 차용해 거기에 논평을 더하는 전략으로 정전(canon)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 위장의 모티프는 사실상 새로운 영화 만들기의 전략이라 일컬을 만하다.
무엇보다 이름을 발설했다는 사소한 실수가 백인-권력과 흑인-피권력이라는 둘의 위치를 역전시키는 재밌는 상황을 유발하는 동시에, 백인 남성도 자유롭지 않은 당사자성의 문제를 함께 피력한다. 왜냐하면 필립 또한 유대인이라는 소수성 때문에 그의 사상과 신체를 ‘검증’하려는 필릭스의 경계에 계속해서 노출되기 때문이다. 필릭스의 견제가 과열해지자 필립은 이 작전에서 발을 빼려 하는데, 그때 론이 묻는다. “그놈 증오를 들었을 때 열받지 않았어요?” “당연히 그랬지.” “그런데 왜 상관없는 것처럼 행동해요?” 이 대화는 혐오와 차별이 피부색을 막론하고 언제든 그 대상을 찾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블랙클랜스맨>에서 위장은 명백히 다른 조건에 놓인 두 인종이 하나의 임무를 위해 협력하는 공동체를 꾸릴 기회를 마련하며, 또한 타인의 삶에 나를 이입하게 만드는 기제로 기능한다.
그런가 하면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제목은 명료하게 신약성서 속 유다와 예수를 환기한다. 배신자의 원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가룟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이었지만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긴 후, 부끄러움에 목을 매달고 세상을 등진다. 어쩌면 유다야말로 다양한 이야기에서 오랫동안 위장의 모티프를 담당해온 캐릭터가 아닌가. 물론 성서에서도 그렇듯 유다는 대개 조연이었다. 그 이유는 자명하게도 주인공은 메시아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메시아를 ‘진짜’ 메시아로 만들기 위해서는 드라마의 절정부를 격정적으로 고양시킬 과정이 수반된다.
그런데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유다, 그러니까 빌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빌 역의 러키스 스탠필드와 프레드 역의 대니얼 컬루야를 모두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렸지만,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 서사를 관통하는 시점을 지닌 인물은 빌이다). 이는 영화가 숭고보다는 세속에, 말하자면 위장의 불투명함과 모호함이라는 성질에 더 집중하겠다는 의도가 깃들어 있는 건 아닐까.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일반적인 극영화가 시도할 법한 프레드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대신 배신자의 얼굴을 제일 먼저 등장시켜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경유해 프레드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뒤에 더 언급하겠지만 이 때문에 본편은 유다가 쓴, 메시아에 관한 평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시한 건달에서 본의 아니게 국가권력을 뒤에 둔 정보원이 된 빌은, 그러나 전혀 에스피오나지 무비의 매력적인 첩보원으로 고안되지 않았다. 애초에 빌은 마틴 루터 킹이나 맬컴 엑스가 살해당했을 때도 이 부조리한 체제에 관해 숙고해보거나 온당한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는 어느 편의 대의에도 동감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 정체가 들통날지 전전긍긍하는, 지질한 모리배에 불과하다. 물론 영화는 빌과 당원들이 우정을 공유하는 듯한 장면들을 몇몇 제시하지만, 그것들이 그의 내면을 소상히 알려주지는 못한다. 가령 당원들과 경찰 간 총격전이 벌어질 때 빌은 혼자 도망치지만, 불탄 당사를 재건할 때는 밤낮없이 최선을 다한다. 이렇듯 박쥐처럼 로이와 프레드 사이를 오가면서도 그가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제 삶을 어떤 노선에 투신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장면은 한 숏도 없다.
빌의 정서를 요약할 만한 대목으로 프레드의 출소 연설회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주먹을 들고 프레드의 이름을 연호하던 빌은 군중 틈에 잠입한 로이와 눈이 마주치는데, 이때 영화는 둘의 숏-리버스숏에서 서로의 얼굴만을 또렷하게 비추고 나머지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한다. 그러다 마침내 빌의 얼굴은 희미한 군중 속에서 소멸할 것처럼 작아지는 반면, 다음 장면에서 로이의 얼굴은 훨씬 많은 부분을 선명히 차지하고 있다. 이 연결은 로이가 빌을 밀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빌은 로이로 위시되는 국가권력의 압력을 바라보는 채로, 그러나 입으로는 프레드를 응원하는 구호를 외친다. 이 세 인물이 이루는 관계의 역학은 빌이라는 거점을 중심으로 교통한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을 비롯해 서사 내에서 빌이 불안해한다는 표면은 끊임없이 제시되지만, 그가 이 투쟁을 자신의 삶에서 어떤 가치로 위치시키고 있는지는 여전히 공백 상태로 남겨진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관객에게까지 속임수를 쓰며 등장한 그에게는 진심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프레드 햄프턴이라는 성인(聖人)을 등장시키면서도 매우 세속적인 서사로 전락한다. 전체적인 관점의 주체는 위장꾼 빌이지만 그의 내면은 정확히 포착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영화는 끊임없이 진짜와 가짜 사이의 모호함을 역설하게 된다.
<블랙클랜스맨>과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서 위장이란 이토록 즉흥적이고 우연한 상황에 기대 발생한다. 한 명은 자신의 이름을 대놓고 말해서, 다른 한 명은 차를 훔치려다가 이 거대한 위장의 판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각각 ‘영화 만들기’의 방식과 ‘신화 가져오기’의 방식을 차용한 두 편의 위장이라는 모티프는 내적 질서를 촘촘하게 구축하도록 돕는 서사적 지지대가 된다. 무엇보다 두 영화는 각기 다른 전략을 이행함으로써 상이한 방향의 결과로 도출된다.
<블랙클랜스맨>, 정전을 논평하기
먼저 <블랙클랜스맨>은 어느 고전영화의 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결과물이라는 산업적 측면과 더불어 빽빽한 군중을 비추는 부감으로 영화미학적 측면을 함께 인정받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그 유명한 크레인 숏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러 연극과 뮤지컬로도 리메이크되며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정전이지만, 동시에 남북전쟁 이전의 남부를 미화한다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는 명암을 지닌 작품이다. <블랙클랜스맨>은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1939년(<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제작된 연도), 혹은 더 거슬러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자리를 불러와야만 가능한 논의가 상존한다는 뜻이다.
정전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귀중한 가치를 대표하는 상식으로서 호명되거나 시네마의 계보에서 범접 불가능한 이상으로서 소환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정전을 통해 당대에 미처 이뤄지지 못했던 논의를 이후에 발견할 여지를 생성해내거나, 이미 선행된 바 있음에도 끝내 수용되지 못했던 담론을 다시금 부연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야말로 정전을 홀대하지 않는 태도가 아닐까. 요컨대 <블랙클랜스맨>은 미국에서 영화-미디어가 관객을 대상으로 저질러온 만행을 폭로하는 신랄한 정치적 텍스트이기도 하다(<블랙클랜스맨>이 품고 있는 이 논쟁은 여전히 동시대적이어서, 단적인 예로 지난해 HBO맥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뉴스가 떠오른다. <노예 12년>의 각색가 존 리들리가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인종차별적 편견을 이유로 상영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블랙클랜스맨>이 형식적으로 수행하는 전략을 ‘정전을 논평하기’로 명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컨대 <블랙클랜스맨>은 당대에 편견을 고착화하며 심지어는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데 일조했던 ‘미학적’ 장면들을 인용하고 거기에 코멘트를 닮으로써 현재적 의미를 산출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그 ‘명장면’ 다음으로 케네브루 박사가 등장해 미국 주류 지배계층의 대변인을 참칭하며 혐오발언을 늘어놓을 때는 D. W.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 속 장면들이 삽입된다. 케네브루가 “더러운 원숭이들은 거짓말을 일삼고, 백인들과 동등해지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죠”, “강간범이자 살인자이며 백인 숫처녀의 살결을 탐합니다”라고 말할 때, 영화는 <국가의 탄생>의 그 유명한 장면을 상연한다.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하려 다가가자 여성이 절벽에서 추락하는 대목이다. <블랙클랜스맨>은 이 시퀀스 다음으로 필름 영사기의 정면을 맞붙인다.
그다음으로는 절벽이 보이는 산의 풍광을 비추는 화면이 이어진다. 이 숏의 배열은 의미심장하게 보이는데, <바람과 함께 시작하다>에서 <국가의 탄생>까지 내내 필름의 불균질한 질감으로 지속되던 영화가 영사기를 비춘 다음 산의 모습을 등장시킬 때는 디지털의 선명한 화면으로 넘어오기 때문이다. 도식적인 구분을 무릅쓰고, 이질적으로 구분되는 두 질감의 차이가 일으키는 감상을 거칠게 주장해보고 싶다. 거대한 산을 공중에서 담은 몽타주는 21세기-현재 관객의 눈에는 더욱 ‘현실’에 가까운 물질성으로 인식되는데, 이를 <블랙클랜스맨>이 들이대고 있는 물음이라고 생각해봄직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지금 ‘현실’로 냉큼 도약한 우리 앞에 여전히 웅대하게 서 있는 저 산의 절벽에서, 정말 타인을 떨어뜨리는 이들은 누구인지를 심문해야 한다는 것.
당연하게도 <블랙클랜스맨>이 정전을 활용하는 방식은 오마주가 아니다. 도리어 이 유서 깊은 텍스트들을 작금의 관점에서 재고하자는 선언적 패러디에 가깝다. 그 때문에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KKK단의 세례식과 흑인학생회 모임이 번갈아 등장하는 것은 <국가의 탄생>이 영화사에서 최초로 선보였다던 교차편집을 지금에 맞게 (재)정립하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KKK단의 침례 의식이 거행될 때, 흑인 노인은 고문을 당해 죽은 친구에 관한 기억을 구술한다. 영화는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판이한 현장들을 나란히 진행시킴으로써 평행하는 두 집단의 모습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사실 교차편집 기법은 위장이라는 모티프에 용이한 방식이기도 하다. 연기자가 상대 진영에 들어가 있을 때, 동시간대에 감독은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듣고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청을 통해 듣는 위치로 유지되던 론의 역할은 이제 상황의 전반을 목격하는 위치로까지 확장되는데, 바로 이 시퀀스를 통해서다. KKK단이 <국가의 탄생>을 단체관람할 때, 영화는 광기에 사로잡힌 백인들의 객석 뒤편에 작은 창문이라는 또 다른 프레임을 계속해서 기입해둔다. 이 창문 속 론의 실루엣은 내내 <국가의 탄생>을 감상하고 있음은 물론이며 이에 호응/야유를 토해내는 백인 관객을 함께 바라보며 자리하고 있다. 그는 지금 가장 타자화된 감독의 위치에 있다.
논평, 즉 말을 얹는 행위로서 장난스러운 농담과 거친 미러링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 또한 <블랙클랜스맨>이 지닌 흥미로운 시도의 일부다. 연설회장에서 콰메 투레는 어린 시절 <타잔>을 즐겁게 관람했다고 말한다. 백인 타잔은 항상 흑인 원주민들을 무찌르는 영웅으로 극화되었는데, 그걸 보며 본인도 “저 짐승을 죽여라”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위가 곧 자신을 죽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밝힌다. <블랙클랜스맨>은 기성 매체가 실어나르던 편견을 영화 속 대사로 끊임없이 반박한다.
이 전략이 가장 뚜렷이 제시되는 장면은 바로 영화의 후반부, 데이비드 듀크와 론의 통화에서다. KKK의 대표자 데이비드 듀크는 백인과 흑인의 말투를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는 론을 백인으로 철석같이 믿는다. 이후 사건이 일단락되고, 론은 데이비드 듀크에게 전화를 걸어 (백인 남성의 성기를 비꼬는 대사와 함께) 그가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다는 ‘흑인식 영어’를 쏟아붓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처럼 <블랙클랜스맨>은 미러링이라는 수행적 전략을 통해 기존의 관념들에 불온하게 저항한다. 미러링의 사회적 측면에 관해서는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이 장면만큼은 <블랙클랜스맨>의 전략이 통쾌하게 구현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이중복제된 평전
샤카 킹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사실 관습적이고 평이한 숏들로 이뤄진 영화다. 우선 영화는 빌의 ‘아이즈 온 더 프라이즈’ 인터뷰 속 짧은 화면으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숏들은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에서 굵직한 사건들을 요약한 푸티지들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블랙 팬서>를 비롯해 시카고 필름 아카이브에서 가져온 영상물의 연쇄 끝에는 ‘블랙 메시아’라고 불리는, 흑표당 일리노이주의 지부장인 프레드의 얼굴이 등장한다. 프레드의 얼굴은 당시 FBI 국장이던 J. 에드거 후버에 의해 무대 위 스크린에 올려진다. 후버는 그의 얼굴을 전면에 공개함으로써 요원들을 향해 흑표당을 강력히 감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때 머지않아 빌의 배후가 될 로이가 이 장면을 주의 깊게 바라본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서 무대에 오르는 사람과 청중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구도는 자주 반복된다. 이는 후버의 발표 장면과 더불어 프레드의 연설 장면들에도 해당하는 형태이다. 흥미로운 점은 연설자는 항상 확신에 차 있는 반면, 청중은 종종 주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청중이 어느 편에 있든 막론하고 벌어진다. 예컨대 로이는 FBI 요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들을 거론하는 후버에 의해 감시의 압박을 받는다. 또는 데보라의 경우, 남편 프레드의 대의에 함께하면서도 임신한 아기와 안온한 가정을 꾸리겠다는 소망이 좌절될까 두려워한다. 물론 이러한 성질은 빌에 의해 가장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영화의 처음과 중간의 사이사이, 그리고 가장 끝에 등장하는 빌의 인터뷰 장면간 차이 때문이다. 영화의 처음과 중간에 나오는 인터뷰는 러키스 스탠필드가 연기한, 극화된 인물인 빌의 장면인 반면, 결말부의 그것은 실제 1990년 1월에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실존 인물 빌 오닐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두 영상은 거의 같은 구도, 질감, 미장센으로 구성되어 있어 화면상으로 포개어지는 꼴이다. 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원본이나 복제본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두개의 판본을 모두 필요로 했을까. 이 의아한 결정은 관객에게 기이한 혼란을 야기한다. 물론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서 ‘진짜’ 빌 오닐을 지목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끝내 빌의 내면이 관객에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실제 빌 오닐은 (FBI에서 천문학적인 액수를 수령하고도) 스스로를 열렬히 활동한 투쟁가라고 자처한다. 게다가 영화는 자막을 통해 후대에 이뤄진 흑표당과 연관된 상황들을 꽤 자세히 서술하면서도, 정작 빌이 세간에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는 알리지 않는다. 이 선택은 영화가 진짜와 가짜라는 두 가지 형상을 나열하고는 오히려 그 사이를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빌을 경유하여 프레드를 바라보는 식으로 그려진, 말하자면 빌이 쓴 프레드의 평전의 형식이라 일컬을 수 있지 않은가. 이 전기에서 프레드는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펜을 쥔 이는 빌이다(복음서의 저자도 예수가 아니었지만, 본편에서 저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은 마태나 요한이 아니라 배신자인 유다라는 사실에 방점이 찍힐 것이다). 이 관점에서라면 영화가 인물들이 특정한 가치들 사이에서 갈등하거나 동요하는 모습들을 꿋꿋이 포착하면서도 정작 프레드는 누구보다 숭고한 선인이라는 확실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오로지 대상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무엇보다 여기서 빌은 관점을 선취하고 있는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속내는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다. 그런데 이는 이 매체의 양식적 특징에서 기인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호함이 도리어 본편의 본령이 되는 것 같다. 자크 랑시에르는 전기라는 문학적 양식을 일컬어 “현실과 허구 사이의 이중적 판별 불가능성의 특권적 장소”라고 짚은 바 있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서 빌의 내면이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 것은, 사실의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와 가짜를 끊임없이 왕복운동하는 전기 양식의 특징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에는 또 다른 형식이 덧대어지는데, 바로 영화의 성질이다. 문자를 통해 속속들이 설명이 가능한 문학과 달리, 겉면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뒤집어 내부에 산재하는 상세한 것들을 일일이 서술할 수는 없는 영화의 한계 말이다. 즉 빌은 이 이중의 레이어를 통해 이데올로기라고 운위되는, 우리가 믿고 지키려는 사상이란 사실은 끊임없이 이중성과 자기모순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질문하는 기틀이 된다. 배신자가 쓴 메시아에 관한 전기로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분열을 지닌 텍스트다. 원본과 복제본이라는 두개의 판본으로 이뤄진 빌 오닐의 인터뷰 장면 또한 이 이중성에 기댄 전략은 아닐까.
그러니 본편을 ‘선지자의 순교’나 ‘배신자의 최후’로 단일하게 요약하는 독법은 모두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빌의 존재를 통해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흑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유대는 본유적으로 혹은 선험적으로 전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빌이 느끼는 불안의 감정은 진실을 끝내 불가지의 영역으로 이끈다. 이 점에서 영화는 성인 프레드 햄프턴을 스크린에 되살리면서도, 빌이라는 불온한 캐릭터에 시선을 할애함으로써 자기모순을 곱씹는 복합적인 작품으로 남는다. 연대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그것이 모두에게 가능한 것이라고 손쉽게 전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