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작은 몸짓: '끝없음에 관하여'가 보여준 삶의 단면들에 대하여
2021-12-29
글 : 박정원 (영화평론가)

“그럼 뭘 믿고 살아요?” “그건 저도 모르죠. 살아 있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아죠.” 믿음을 잃은 사제에게 건네는 정신과 의사의 이 말이 어쩐지 조용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무표정한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 한 남자가 흐느낀다.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고 적막만이 그의 울음소리를 감싼다. 남자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근처 승객들에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여러 번 외쳐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을 때, 건너편 창가에 앉은 다른 남자가 말한다. “불쌍한 인간. 자기 집에서 슬퍼할 것이지 왜 여기서 저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끝없음에 관하여>를 만들기 이전 15년에 걸쳐 로이 안데르손 감독이 선보여온 ‘인간 3부작’을 가득 채운 불안과 소외의 정서를 드러낸다. 안데르손은 ‘인간 3부작’을 통해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삶의 부조리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도시의 냉담한 풍경을 그려왔다. 깊이감을 살리는 딥포커스, 고정된 카메라, 롱숏, 롱테이크 등 그의 엄격한 형식은 신작에서도 여전하다. 이번 작품은 전작들보다 한결 더 간결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인간 3부작’을 아우르는 몽환적인 블랙코미디의 톤이 거의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얄궂게 울려퍼지는 경쾌한 테마곡도(<비둘기, 가지에 앉아 존재를 성찰하다>(2014)), 깨어나고 싶지 않은 달콤씁쓸한 꿈도(<유, 더 리빙>(2007)), 대미를 장식하는 압도적인 정념의 폭발도(<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2000)) 없다.

사라지지 않는 것들

영화는 그저 76분간 (타이틀 시퀀스 이후) 32개의 숏을 플랑 세캉스(원신 원숏)로 구성한다. 인생의 어느 국면을 건조하게 포착하는 각각의 숏들은 번번이 타인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하고 마는 안데르손의 인간 군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일부를 제외하곤 내용 측면에서 서로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숏들 위로 겹쳐 오르는 건 한 여성의 감정 없는 목소리다. “한 남자를 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는 초월적 존재로서 인물들을 바라보며 그들의 벗어날 수 없는 고독과 절망을 진단한다. 고독과 절망은 ‘인간 3부작’과 마찬가지로 주로 그들이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에서 비롯되는데, 그들은 이미 무엇을 잃었거나 곧 잃게 될 사람들이다.

이때 화면상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사연을 일러주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있긴 하지만, 카메라의 움직임이 없는 롱숏, 롱테이크의 회화적 프레임은 보는 이에게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지시해주지 않기에 얼마간 막막하게 느껴진다. 관객은 모든 것이 선명한 딥포커스의 화면을 각자의 재량대로 마주해야 한다. 이같은 조건은 단일한 숏 하나뿐 아니라 전체 숏들의 흐름에도 해당된다. 앞서 언급했듯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장면들은 서로 독립되어 있는데, 내러티브적 연결성에 무관심해 보이는 이 숏들의 흐름을 보고 있자면 영화가 제목처럼 ‘끝없이’ 까마득하게 이어질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물리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영화는 불가능하기에 32개의 숏이 끝나면 영화도 끝난다. 그리고 거기엔 닫히지 않은 채 무엇인가 계속될 것만 같은 영원성의 감각이 남아 있다.

이 영화의 마지막이 마침표 없는 문장처럼 다가온다면 그것은 영화 전반에 은밀히 반복되는 변화들과 그 존재감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23번째 장면을 살펴봐야 한다. 다른 숏들에 도사리고 있는 고독과 절망이 느껴지지 않는 숏 중 하나인 23번째 장면에는 소년과 소녀가 등장한다. 책을 읽던 소년이 말을 꺼낸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에너지이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보존되며 한 가지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바뀔 뿐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에너지이고 나도 에너지야. 그리고 너의 에너지와 나의 에너지는 영원히 존재하는 거야. 새로운 것으로 형태가 바뀔 뿐이지.” 사랑을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와 지하 벙커의 히틀러 사이에 배치된 이 장면은 앞뒤 장면의 침울하고 음험한 분위기를 이질적으로 이어 붙이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영화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만 반복되는 변화의 속성을 ‘끝없음’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로 바뀌어 지속되는가. 이를테면 마음이 온통 딴 데 가 있는 웨이터가 넘치게 따른 포도주(3번째 장면·이하 장면은 숫자로 표기)는 신에 대한 믿음을 잃고도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는 사제가 병째로 들이켜는 포도주(12), 환자를 치료하지 못한 치과 의사가 마시는 술(29)로 형태를 조금씩 바꿔가며 등장한다. 그들의 정신적 문제는 직업에 영향을 끼치며, 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술이다. 한편 사제의 악몽 속 나무 십자가(6)는 전혀 다른 시공간 속 남자의 죽음이 예견된 나무 기둥(18)과 연결된다. 사물뿐만 아니라 어떤 상태나 기운 또한 마찬가지다. 가족의 명예(21)나 사랑(22)을 핑계로 한 폭력의 양상은 유사하며, 사랑을 찾지 못한 젊은이(8)와 길 잃은 남자(17)의 발걸음은 닮았다. 반복되는 전쟁의 살기는 누군가의 두 다리를(10), 누군가의 아들을(13), 또 누군가의 자유를(30) 앗아간다. 혼돈과 상실과 고독과 슬픔과 절망은 사라지지 않은 채 변화하며 언제 어디에선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영화가 보여주는 인생의 단면들을 관류하고, 안데르손이 생각하는 인간의 운명, 삶의 속성을 드러낸다. 불운과 상실, 그것을 피할 수 없기에 인간은 취약하다.

그럼에도 삶은 아름답다

그러나 영화는 이같이 반복되는 고통의 이미지 속에 이따금 이유를 알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순간들을 섞어놓는다. 할머니가 아기의 사진을 찍고(11), 젊은 여자들은 춤을 추며(19), 창밖으로 환상적인 눈이 내린다(29). 이 장면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앞뒤 장면의 상실감, 절망감과 대비되어 더 아늑하게 다가오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14번째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폐허가 된 도시 위로 샤갈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어느 연인이 포옹한 채 떠다닌다. 좀처럼 움직임이 없던 카메라가 그들의 속도에 맞춰 조금씩 트래킹하며 잿빛 하늘 속 연인을 담아낸다. 폐허의 황량감과 사랑의 환영이 기이하게 뒤섞인 이 장면은 사라지지 않을 절망과 마찬가지로 사라지지 않을 아름다움을 하나의 숏 안에 느리지만 집요한 운동감으로 포착함으로써 세속적 삶의 숭고함을 그려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한 남자가 고장난 차를 고친다. 구두가 망가진 여자(20)처럼 이 남자도 이동이 중단된다. 저 멀리 하늘에 새 떼(1)가 다시 날아간다. 9월(1)에서 시작하여 겨울(28, 29, 30)을 지난 영화는 기적처럼 다시 9월(32)로 돌아온다. 차를 고치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지만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다.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다던 버스 안의 남자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지만, 이 남자는 차를 고치기 위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을 움직인다. 바로 거기서 안데르손은 영화의 막을 내린다. 어쩌면 삶의 진정한 불행은 오리무중의 불운과 상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무감함과 단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제 다시 풀릴지 모를 딸의 신발끈을 묶기 위해 쏟아져내리는 비를 맞던 아버지의 모습(26)이 깊은 감동을 남기지 않았던가. 삶은 사라지지 않은 채 ‘끝없이’ 변화하고, 그곳엔 혼돈과 상실과 고독과 슬픔과 절망이 혼재한다. 그럼에도 나아가려는 작은 몸짓, 그것이 <끝없음에 관하여>에서 엿볼 수 있는 삶의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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