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킹메이커' 변성현 감독이 1970년대의 김대중과 그의 선거 참모였던 엄창록의 관계를 담은 방식
2022-01-28
글 : 송경원
역사를 만든 사람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고등학교 논술 시험 단골처럼 익숙한 질문에 대한 답은 오래전부터 제시되었다.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는 ‘이상’을 배운다. 하지만 현실에선 수단이 목적을 앞지르는 일이 빈번하고, 이상을 지켜나가는 일은 고난과 어려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앞에서 쉽고 당연해 보였던 답은 규제와 제약으로 변모한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았던 이들이 존경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정 어려운 건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하는 것보다 그것을 끝까지 관철해나갈 수 있는지에 달렸다. 그렇다고 이상(목적)을 고집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현실에서 성취되지 않은 목적은 공허한 구호로 흩어질 수도 있다. 철학자 파스칼의 말을 빌리자면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목적과 수단이 각각 이상과 현실이라는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할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정치다. 정치인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존재다. 김대중이 한국 정치사에 대체 불가한 거인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이상과 현실을 한몸에 품은, 이른바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얼핏 조화로운 정답처럼 들린다. 서생의 문제의식으로 이상을 좇고, 상인의 현실감각으로 실용적인 수단을 동원하면 모두가 좋아할 것만 같다. 실상은 반대다. 이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기보다는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양쪽에서 공격할 빌미를 제공한다. 서생의 문제의식은 답답한 원칙론자의 한계처럼 느껴지고, 상인의 현실감각 때문에 상황에 타협하는 수완가처럼 오해받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정치인 김대중은 양쪽을 한몸에 품으려는 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의 진가는 여기에 있다. 한국 정치사의 질곡을 버텨낸 오랜 고난의 여정 끝에 질문은 수정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해결될 수 없는 명제에서 ‘목적과 수단이 진정 분리될 수 있는가’라는 합리적 의심으로. 목적과 수단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김대중의 정치 여정에서 리트머스지와 같은 존재가 있다. 선거판의 여우, 네거티브 선거전의 달인이라 불렸던 선거 참모 엄창록이다.

김대중, 엄창록을 김운범, 서창대로 각색해야 했던 이유

변성현 감독의 <킹메이커>는 김대중과 그의 선거 참모였던 엄창록의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다. 왜 이제야 영화로 만들어졌을까 싶을 만큼 두 사람의 관계와 그에 얽힌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함경북도 출신이었던 엄창록은 전후 강원도 인제군에서 한약재상을 하다 1961년 김대중의 비서가 된다. 이후 엄창록은 김대중의 강원 인제 보궐선거 국회의원 당선에 일조했다. 당시 돈과 권력을 동원한 부정선거가 만연한 공화당에 맞서 엄창록이 선보인 선거 전략은 그야말로 기발했다. 오늘날 네거티브 선거전의 교과서라 할 만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화당원 혹은 지지자로 위장, 거드름을 피우고 다니다가 사람들에게 여당 후보를 찍으라고 권하며 담배를 피운다. 이때 자신은 양담배를 피우면서 유권자에게는 싸구려 담배를 내민다. 이 모습을 본 유권자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동네에서 제일 큰 식당을 빌려 여당 후보 이름으로 사람들을 초청한 일도 있다. 여당 후보는 당연히 나타날 리 없고, 식당 안은 여당 후보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다. 그 밖에 고무신이나 와이셔츠 등 금품 살포를 하는 여당에 맞서, 여당 선거원인 양 위장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줬던 선물을 회수한 사건도 있었다. 본래 줬다가 뺏는 게 더 짜증나는 법이다. 변성현 감독은 엄창록의 이런 기상천외한 선거전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다만 변성현 감독은 김대중과 엄창록, 두 사람의 일화를 구태여 김운범(설경구)과 서창대(이선균)라는 다른 이름으로 바꿔 묘사한다. 상당 부분 실제 에피소드에 기반했음에도 굳이 캐릭터명을 바꾸고 픽션임을 강조하는 등 현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애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픽션임을 강조하면 좀더 극적인 면을 부각할 수 있다. 각색의 자유로움을 확보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름을 바꿔가면서까지 실제와 구분할 필요가 있었던 건 캐릭터와 영화의 방향성 때문이다. 제목처럼 이 영화는 킹메이커가 되고자 했던 이에 관한, 적어도 스스로 그렇게 믿었던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방점은 어디까지나 킹이 아니라 킹메이커였던 서창대에 찍혀 있고, 서사의 관점 역시 선거판의 여우, 그림자라고 불렸던 사나이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때문에 ‘김대중’이라는 거인의 아우라를 어느 정도 걷어내는 건 필수 작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확히 <킹메이커>는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행적을 김운범과 서창대, 두 인물로 분리하여 묘사한 영화다. 실존 인물인 엄창록에 대한 다시 쓰기를 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김운범이 김대중이 지닌 ‘서생의 문제의식’을 대변한다면, 서창대는 김대중의 ‘상인의 현실감각’을 상징하는 캐릭터다. 요컨대 이 영화는 김대중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기억, 목적과 수단의 갈림길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약방을 운영하는 서창대에게 순박한 농부가 찾아와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한다. 자신의 달걀을 부당하게 도둑질당했는데 상대가 권력자의 친인척이라 손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서창대는 달걀 도둑을 닭 도둑으로 만들 수 있는 꾀를 알려준다. 망설이는 농부에게 서창대는 ‘나쁜 놈들 혼내주는 데 깨끗하게만 싸울 수 없다’고 피력한다. 서창대의 관점은 그의 선거 전략 전반으로 확장된다. “사악한 방법이죠. 근데 문제는 우리가 깨끗하게만 싸울 수가 없다는 겁니다.” 보기에 따라서 비겁하고 치졸한 꾀로 보일지라도 상대가 룰을 다 어기는데, 혼자만 룰을 지키며 게임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여긴다. 악을 제압하는 편법. 거기서 서창대라는 인물의 매력이 빛을 발한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악(巨嶽)을 응징하는 서창대의 모습은 마치 다크 히어로 같다. 여기엔 대전제가 필요하다. 서창대가 이상으로 여기는, 꿈을 맡긴 김운범의 정의가 올바르다는 전제. 하지만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힘을 가진 승자가 곧 정의라는 것과 진배없다. 서창대의 모순은 여기에 있고, 정치인 김대중의 덩치가 커질수록 두 사람의 예정된 파국은 다가올 수밖에 없다.

기시감이 드는 영화 한편이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2012)은 링컨의 드높았던 이상과 순교자적 이미지 이면에 감춰진 더러운 손을 조명한 영화다. 목적과 수단 사이의 괴리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두 영화는 닮았다. 고결한 이상에 봉사하는 추악한 손. 기꺼이 더럽혀지기로 한 그 선택들은 현실 정치에서 여러 흔적을 남기며 끝내 숭고한 것으로 기억된다. <킹메이커>는 이런 역설의 한가운데에서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아니다. 한몸에 담을 수 없는 모순을 두 인물에게 나눈 후, 그중 수단에 삼켜질 수밖에 없었던 남자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영화다. 영화의 말미, 서창대는 자신이 처음에 받았던 농부의 에피소드를 김운범에게 다시 던진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 사실 서창대는 김운범이 어떻게 답할지 이미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자신은 끝내 가지 못했던 길. 김운범과 서창대의 길이 갈라지는 건 목적이 우선이냐, 수단이 우선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당신을 증명하는 건 당신의 생각이 아니라 행동, 걸어온 길이다.

스타일리시한 정치극. 가벼워짐으로써 얻은 것들

변성현 감독은 서창대의 관점에서 김운범이 품고 있는 모순을 해체한다. 대신 평행선을 달리는 질문에 대해 깊숙이 파헤쳐 들어가기보다는 두 사람 사이 형성되는 애증의 관계에 좀더 무게를 두고 그려낸다. 덕분에 영화는 현실이나 역사의 재현이라는 사슬에서 상당히 자유롭게 풀려나 경쾌한 터치를 선사할 수 있다. 전작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에서 적이자 동지였던 두 남자, 한재호(설경구)와 조현수(임시완)의 관계를 멋들어지게 그렸던 변성현 감독은 또 한번 자신의 장기를 십분 발휘할 무대를 마련한다. 무겁고 어려울 수 있는 역사와 정치라는 소재에 끌려다니는 대신 자신의 주무대로 가져와 경쾌하고 스타일리시하게 그려낸 것이 <킹메이커>의 미덕이다. 초중반 서창대가 선거판을 휘저으며 부패한 여당을 골탕먹일 때 김운범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서창대의 원맨쇼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동시에 영화의 균형이 지나치게 서창대 중심으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싶은 타이밍에 큰 정치인으로서의 김운범의 매력적인 면모를 적절히 부각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일종의 꼼수가 도리어 외통수로 돌아온 순간, 정치인 김운범은 다시금 정도를 거론하며 위기를 돌파한다. 다만 편법에 의존하는 한 이런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고, 두 사람의 가장 빛나는 순간은 곧 결별할 수밖에 없는 균열의 시작이기도 하다.

<킹메이커>는 킹과 메이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지만 흥미로운 지점은 어디까지나 그림자로 살아야만 했던 메이커 서창대의 흔들리는 내면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서창대의 지략이 빛을 발하는 야당 대선 후보 투표일, 영화는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전면에 나선 김운범, 김영호(유재명), 이한상(이해영)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한컷에 압축하여 담아낸다.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정치인들과 그 위 그림자에 숨어 이를 움직이려는 서창대의 모습은 나선형의 계단을 중심으로 그야말로 절묘하게 그려진다. 여기에 화룡점정은 그림자 속에 살던 서창대의 얼굴에 흐르는 한 줄기 땀방울이다. 역사는 선거판의 여우, 그림자, 책략가, 네거티브 선거전의 달인 등 그의 겉모습만을 기억한다. 그림자 안에서 판을 움직이는 사람이 대단하고 신비로워 보이는 건 그가 정체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대상을 두고 사람들은 호기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킹메이커>는 그림자 속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그림자의 표정을 잡아낸다. 거인의 표정이 아니라 그림자의 고뇌. 전면에 나서고 싶지만 그러지 못했고 수단에 먹혀 이상을 접은 남자. ‘링컨’의 더러운 손이 역설적으로 그의 숭고함을 증명한다면 김운범(=김대중)의 현실적인 전략은 끝내 잘려나가 어두운 자리에서도 여전히 빛을 동경한다. 이것은 목적과 수단, 옳고 그름, 선악, 정의에 대한 판가름이 아니다. 그저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한때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 사이의 갈라진 길에 대한 이야기다. 그 모든 갈림길마다 평범한 사람들, 적당히 비겁하고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올바람에 대한 동경을 놓지 않았던 소시민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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