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 나오미 애키, 마크 러펄로, 스티븐 연,최두호 프로듀서(왼쪽부터).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공개된 봉준호 감독 신작 <미키 17>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2월20일 오전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내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봉준호 감독과 배우 나오미 애키, 스티븐 연, 마크 러펄로, 최두호 프로듀서가 함께했다. 동명의 SF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미키 17>은 사업 실패로 거액의 채무를 떠안은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가 사채업자를 피해 ‘익스펜더블’ 보직에 자원하여 외계 행성으로 떠나면서 벌어지는 소동극을 담고 있다. 그가 엉겁결에 자원한 익스펜더블은 휴먼 프린팅을 통해 위험한 일에 투입되어 소모품이 되는 역할이다.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의 차별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휴먼 프린팅이 기존 SF물 속 복제인간 소재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치 사무실에서 HP 프린터로 서류를 출력하듯 유기물을 조합해 인간을 뽑아내는 휴먼 프린팅은 함께 있어서는 안될 단어의 조합이다. 그 자체가 희비극의 속성을 담고 있다.” 잔혹하면서도 애처로운 공정의 피해자인 주인공 미키도 SF 장르에서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그렇게 출력된 결과물이 미키이지 않나. 착하지만 어리바리하고 사기를 쉽게 당할 정도로 매번 손해만 보는 사람이다. 슈퍼히어로나 초능력자가 아니라 평범하고 가여운 인간이 출력된다는 점이 기존의 SF와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작품마다 배우에게 기존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얼굴을 부여한 봉준호 감독답게 이번엔 로버트 패틴슨을 남루한 노동자로, 마크 러펄로를 과장된 독재자로 변모시킨 점도 눈에 띈다.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지 사람을 볼 때도 이상한 면을 발견하려 한다. 익히 알려진 모습과 다른 면이 보이면 집착이 생기더라. (웃음)” 시사 직후부터 자본주의와 체제에 대한 풍자극이라는 외신의 평가가 있었지만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이 “한 인물의 사소한 감정과 이미지로부터 출발한 영화”라고 설명했다. “프린터로 출력되는 자기 몸을 바라보는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일한 친구가 자신을 괴롭힐 때의 속내는 어땠을까. 그럴 때 나샤(나오미 애키)가 주는 위안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이런 감정을 나누고 싶었다. 연약한 미키가 힘든 위기 속에서 파괴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끝으로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을 극장에서 보는 경험을 강조했다. “우주선이 날아다니고 수만 마리의 크리퍼가 등장하는 스펙터클도 있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배우들의 섬세한 뉘앙스의 연기를 스크린에서 보면 그 자체가 스펙터클의 순간이다. 그래서 극장에서 안 보면 후회할 거다. (웃음)”
저항 끝에 손에 닿은 승리, 나오미 애키
<미키 17>을 통해 처음으로 방한한 나오미 애키는 “오래전부터 한국에 꼭 와보고 싶었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익스펜더블인 미키의 연인이자 최정예 엘리트 요원인 나샤 역을 맡은 그는 “진정성 있고 진실한 사람”이라고 자신의 캐릭터를 설명했다. “그간 연기한 인물들은 항상 감정이나 비밀을 숨기려 했는데, 나샤는 자신이 느낀 바를 솔직하게 내비친다”며 나샤를 연기하면서 “정말 자유롭게 소화했던 역할이었다. 돌이켜보니 스스로 성장했다고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휘트니 휴스턴: 댄스 위드 섬바디>에서 휘트니 휴스턴으로 분했던 나오미 애키를 두고 봉준호 감독은 “목소리가 지닌 힘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의 목소리는 독재자 마셜(마크 러펄로)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호통을 치며 항거하는 용기로 이어진다. 나오미 애키는 그런 나샤의 용기에 대해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들은 영광이나 권력을 좇는 존재가 아니다.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큰 그림을 그리고 이를 이해하기보다는 오로지 공감과 사랑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결국 승리는 그런 이들의 몫”이라고 설명했다. 즉 나오미 애키에게 나샤와 <미키 17>은 “평범함이 지닌 힘”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한다. 여기서 비범함은 영웅적인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는 <미키 17>의 이야기가 지닌 강력한 힘이자 동시에 앞으로 세계 각지에서 우리가 자주 관찰해야 할 현상이기도 하다.”
봉준호 세계관 속 독재자의 얼굴, 마크 러펄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이후 10년 만에 다시 내한한 마크 러펄로는 기자회견장에 등장할 때부터 활력이 넘쳤다. 차기작 촬영으로 바쁜 중에도 한국을 찾은 그는 “지난 방문 때도 큰 환대를 받았었다. 당시 팬들이 보여준 엄청난 반응에 질투를 잘 안 느끼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부러워하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휴먼 프린팅을 활용해 행성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품은 정치인 마셜 역은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도전하는 악역이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 진정 이 배역이 내게 주어진 게 맞나 싶었다”며 캐스팅 당시를 회상한 그는 “결과적으로 영화에 나온 연기에 만족한다”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마셜은 시사 직후부터 외신에서 해외 특정 정치인들을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하지만 마크 러펄로는 “특정인을 연상케 한 것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다만 마셜이란 인물에 “전형적인 정치인의 속성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쩨쩨하고 그릇이 작은 독재자를 오랜 시간 봐왔다. 그들은 오직 자신만 알며 연약한 자아상을 갖고 있다.” 마셜이 자행한 폭력을 바라보며 마크 러펄로는 “마틴 루서 킹 주니어와 간디”를 언급했다. “역사를 배울 때 결국 비폭력 운동이 폭력보다 더 큰 결과를 일궈냈다. 국가의 극단적인 폭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힘이 있다.” 그가 <미키 17>에서 발굴한 메시지는 “국가와 제도보다 훨씬 앞선 여러 사람들의 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