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방향성을 취하고 싶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개봉이 계속 연기된 이유일 수도 있다.”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이 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자 다채로운 반응이 쏟아졌다. 자본주의와 계급을 향한 날카로운 비판, 봉준호 감독 특유의 풍자와 유머에 대한 호평이 다수였지만 <BBC>나 <할리우드 리포터>처럼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미키 17>은 직접적으론 아카데미를 뒤집어놓았던 <기생충>(2019)을 만든 감독의 차기작이지만 유사점을 찾는다면 <설국열차>(2013), <옥자>(2017)와 연결고리를 찾는 게 더 손쉬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8번째 장편이자 역대 연출작 중에서도 가장 큰 예산으로 만들어진 <미키 17>은(<미키 17>의 제작비는 약 1억 1천8백만 달러로 5천만달러였던 <옥자>의 2배에 가깝다) 전세계 관객을 염두에 둔 SF 블록버스터인 만큼 처음부터 목표 지점과 타깃이 명확한 프로젝트다. 애당초 대자본이 투입된 할리우드영화는 창작자의 역량과 무관하게 최대 다수의 보편 공략이라는 보수적이고 안전한 선택으로부터 달아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미키 17>은 어떤 조건과 환경에 놓일지라도, 설사 외계 개척 행성에 떨어트린다 해도 봉준호 영화는 여전히 봉준호의 중력 아래 있음을 새삼 증명한 결과물로 기억될 것 같다.
넓고 얇고 다채롭게, 복제되지 않을 오리지널리티
때론 상찬보다 비판 지점에서 작품의 본질과 지향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이다. 표면적으로는 거의 악플 수준인 <BBC>의 평가는 <미키 17>의 성취와 한계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지표 중 하나다. <BBC>의 요지는 “<미키 17>은 명확한 방향성과 깊이가 부족하다”는 걸로 정리된다. 이러한 관점의 대전제가 있는데, “<미키 17>은 기존 블록버스터들이 갖는 과장된 자기중심적 태도를 배제하려는 노력이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복제인간에 대한 철학적 탐구, 소모품으로 요약되는 자본주의와 계급에 대한 풍자 등 깊이 있는 주제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어떤 한 방향을 깊게 파고들지 못했다”는 것을 비판의 근거로 삼는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건 <BBC>로 대표되는 불호의 평들이 원하는 SF 블록버스터의 방향성이다. 이들은 기존 SF 블록버스터의 패턴이나 자기중심적인 거대 서사에서 벗어나는 건 (개성으로서) 필요하지만 그를 대체할 (또 다른) 선명하고 굵직한 서사가 없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안타깝게도 (동시에 다행히도) 영화를 항해하는 봉준호 감독의 우주선은 애초부터 다른 궤도를 그려왔다. <미키 17>의 세계는 SF 블록버스터가 관습적으로 지향하는 단선적인 서사, 거대한 주제로부터 멀어지려는 원심력으로 유지된다. 하나로 수렴되어 파고들고 끝내 명쾌하게 결론내지 않는 그 흩어짐의 에너지, 지엽적이고 파편적인 공감의 네트워킹이야말로 봉준호 영화의 매혹 중 하나다.
에드워드 애슈턴 작가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한 <미키 17>은 가까운 미래, 얼음 행성 니플하임의 식민지화를 목표로 한 탐험대의 여정을 배경으로 한다. 소수의 인류가 미지의 행성을 개척하는 흔한 이야기에 특별함을 더하는 건 복제인간의 존재다. 봉준호 감독은 소모품으로 사용되는 복제인간이란 아이디어를 뼈대 삼아 무난한 디스토피아 SF를 오묘한 방향으로 확장시켰다. 원작의 미키 7이 17로 늘어난 것만 봐도(10번을 더 죽인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중심축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있다.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친구 티모(스티븐 연)와 마카롱 가게를 차렸다가 망해 거액의 빚을 진다. 사채업자를 피해 우주로 달아나기로 한 두 사람은 우주 탐사에 자원하지만 시작부터 길이 어긋난다. 영리하게 자리를 챙긴 티모와 달리 어수룩한 미키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익스펜더블에 자원한다. 그리하여 죽음이 노동이 된 인간 미키의 웃기고 서글픈 고난의 여정이 시작된다.
<미키 17>의 핵심 아이디어인 ‘익스펜더블’은 인간 복제를 윤리보단 자본주의적인 논점으로 해부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속에서 인간 복제는 기술적으로 가능하지만 윤리적인 이유로 인해 금지된다. 그러자 지구가 아닌 우주에서만, 대원들이 맡기에 위험한 임무에 투입하기 위한 소모품(익스펜더블)으로 복제인간을 투입하겠다는 아이디어가 제시된다. 이 시점에서 이미 윤리적인 질문은 알면서도 눈감는 문제로 패싱당한다. 여기엔 전제가 하나 있는데, 인간을 프린트하는 복제 기술이 경제적으로도 값싸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키의 몸은 용광로에서 재활용되어 계속 프린트되는데, 이런 설정은 윤리보단 경제적인 문제로 집중하기 위한 걸로 보인다.
그리하여 <미키 17>이 노출시키는 건 죽음을 노동으로 삼는 자본주의 계급적 관점이다. 식민행성 개척선이라는 폐쇄된 사회의 맨 밑바닥에는 죽음을 담보로 하는 값싼 노동력의 남자가 있다. 봉준호 감독이 왜 <미키 7>을 원작으로 선택했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미키 17>은 기본적으로는 <설국열차>의 연장에 있고, <기생충>의 영향 아래에서 <옥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여러 SF영화에서 영향을 받은 장면들이 없지 않겠지만 이제 봉준호 영화는 자신의 전작들을 레퍼런스 삼아 세계를 숙성하는 단계에 다다랐다. 그리하여 <미키 17>은 우스꽝스러운 독재자 커플, 개척단 내부의 차별과 계급, 외계 행성의 원주민과의 분쟁 등 SF 디스토피아물이 다룸직한 요소(와 봉준호가 사랑해왔던 모순들)를 총체적으로 훑으며 성실하게 포갠다. 이는 자기복제와는 다르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서로 다른 인격처럼 보이는 것처럼, 얼핏 외양이 비슷해 보이는 요소들은 봉준호라는 창작자의 필터를 거쳐 끝내 다른 무언가로 ‘프린트’된다.
풍자와 우화가 영화의 본체가 될 때
물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미키 17>의 상상력의 기반은 암울하고 흉포한 데 비해 전개 방식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 근거한다. 한마디로 선하다. <기생충>에 빗대어 ‘선을 넘지 않는다’고 해도 좋겠다. 할리우드가 좋아할 안전한 선택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차라리 영웅적인 거대 서사로 수렴되길 거부하는 봉준호답게 이상한 경로라고 해두자. 행성당 1명씩만 허용된 익스펜더블이 모종의 사고로 둘이 되어 ‘멀티플’이 일어난 상황에서 미키 17과 미키 18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멀티플이 되어버린 미키‘들’처럼 이 영화는 상당히 많은 주제와 경로를 제시하는 대신 그것 하나하나를 깊게 파고들진 않는다. 영화의 본체가 캐릭터와 서사의 리얼리티라기보다는 풍자와 우화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미키 17>은 <설국열차> 이후 봉준호 영화가 그랬듯이 상징과 우화로 지어진 집이다. 봉준호의 SF 혹은 판타지적 상상력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를 무대로 지금 여기를 말하기 위해 작동한다. 인류사의 보편성을 관통하고 있는 이 통찰은 때때로 거의 예언에 가까울 정도로 풍자와 비유로서 높은 성취에 도달한다(예컨대 <미키 17>은 미국 대선이 치러지기 전에 제작되었지만 트럼프를 연상시키는 지점들이 꽤 있다). 동시에 그 후폭풍으로 종종 캐릭터가 단선적이고 기능적으로 사용됐단 비판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전에는 이른바 장면의 변태적 디테일로 리얼리티를 채웠지만 이번엔 로버트 패틴슨을 제외하곤 배우의 역량으로 부피를 만들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얻지 못한다. 그럼에도, <미키 17>의 흩어진 방향성은 SF 블록버스터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라기보다는 의도된 산만함이 주는 쾌감으로 작동할 여지가 충분하다. 씨앗은 뿌려졌다. 이제 디테일한 손끝으로 흩뿌려둔 질문들을 수확할 차례다.